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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동국대와 정치

기자명 법보신문

4·19의거 등 격동기 민주화 선봉

<사진설명>독립운동-민주화운동을 이끈 동국대는 격동기 한국 정치사의 신증인이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 4·19 등 수많은 격동기를 거친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동국대 100년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제시대 불교계 선구자들이 건립한 명진학교에서 배출한 만해 한용운 스님은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위한 3·1운동의 횃불이었으며, 이후 불교전수학교, 혜화전문학교, 동국대 출신들에 의해 이어진 민중 운동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동국대가 한국 정치사의 중심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외세에 의한 시련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의 혜명을 받들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불교의 전통, 즉 호국불교 고갱이가 교육 이념에 고스란히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만해 정신 학생운동으로 계승

‘1600여년 면면히 이어왔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겠다’는 동국대의 교육이념 토대에는 삼국 통일의 바탕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 정신이,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던 고려·조선시대, 승병(僧兵)을 조직하고 불법의 홍포를 통해 민중의 단결을 이끌어냈던 호국불교 정신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이런 연유로 동국대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한국정치사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특히 ‘독립선언서’의 초고(草稿)를 담당하고 공약삼장을 서술하며 3·1운동을 주도했던 만해 스님은 중생 구제라는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인물이다. 만해 스님은 동국대 총동창회의 전신인 일심회를 이끌며 애국계몽활동을 주도했고, 불후의 명작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함으로써 시대에 따른 불교계의 개혁을 강력히 주창했다.

이는 당시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불교계의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런 스님의 선구적인 노력은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민족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하는 기폭제가 됐으며, 이후 불교전수학교, 혜화전문학교 학생들의 민족의 자주 확립을 위한 시국강연회, 웅변대회로 이어지는 강력한 토대가 됐다.

해방과 함께 종합대로 승격된 동국대는 순수학문을 추구하는 대학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대사회적 학생운동의 전통도 이어나갔다. 일제시대 학생운동의 주된 화두가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다면, 해방이후 현대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운동의 주된 목소리는 ‘민주화’였다.

1961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심판하기 분연히 일어선 4·19학생운동의 중심엔 역시 동국대가 있었다. 비록 4월 18일 고려대에 민주화 학생운동의 시작을 빼앗겼지만 동국대는 4·19민주화 운동 내내 반정부 시위의 최선봉에 서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4월 19일 고려대 학생운동이 보도된 뒤, 동국대 2000여명의 학생들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석조본관에 몰려들었고, 이후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역사적인 사실은 가슴 뿌듯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아픔에 어느 누구보다 앞장섰던 옛 선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한 동국대 학생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도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았다.

당시 4·19학생운동을 취재한 월간 잡지『신동아』는 ‘사월혁명 후기’에서 “경무대로 가자,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동국대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서울대, 성균관대, 동성고고 등 만 명이 뒤따른 데모대의 주류는 경무대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대 학생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쓰러지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의 최일선에서 민주화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동국대 학생들의 뜨거운 민주화 의지는 결국 이승만 정권의 하야와 함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동국대 학생들의 중심으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의 부정부패를 척결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총칼을 앞세운 군사 정권에 의해 선배들이 흘린 피는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선배들의 구국 정신은 면면히 흘러 후배들의 가슴으로 이어졌다.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선데 이어 이후 민주화를 위한 대장정을 쉼 없이 진행했던 것에 이를 잘 알 수 있다.

민주화 역량 문민정부 견인

이런 동국대의 저력은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동국대 출신 민주화 인사들의 정계 입문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들의 등장은 구태와 부패로 얼룩졌던 한국 정치사에 있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활력으로, 역동적인 힘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70~80년대부터 정계에 입문한 동국대 출신 인사들로 인한 한국 정치계의 새로운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문민정부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문민정부의 주역은 바로 최형우 씨와 김동영 씨였다. ‘좌동영 우형우’라 불릴 정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이들은 60년대 동국대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선·후배 사이로 독재 정권의 압제 속에서 민주화의 불꽃을 지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런 까닭에 문민정부시절은 동국대 출신 정치인의 ‘전성시대’였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은 50~60년대 동국대를 졸업한 최형우, 김영구, 황명수, 정재철 씨 등이 주요 당직을 차지하며 핵심 세력으로 활동했고, 이영창, 남평우, 이긍규, 박희부, 박규식 씨 등도 비록 당직은 맡지 못했지만 국회의원으로서 뛰어난 의정활동을 펼친 이들 이었다. 또 야당이었던 민주당에서도 DJ의 영원한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씨를 비롯해 신순범, 강희찬, 최상용, 구자춘, 양창식, 류인학, 박제상 씨 등이 동국대 출신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이는 당시 서울, 연·고대, 육사의 인맥을 제외하고 최고의 정치 계맥으로 이른바 한국 정치사에 있어 ‘동국대 사단’이 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동국대 출신 정치인들이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정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상황에 따라 정치색깔을 달리하는 일부 철새정치인(?)들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우직하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간 동국대 특유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민정부 시절 첫 국방 위원장을 지낸 황명수 씨는 1953년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 27세의 나이에 조병옥 박사 밑에서 정치에 입문한 뒤 35년간 오직 야당에서 군부독재의 반대를 외친 인물이었다. 또 권노갑 씨도 1953년 경제학과 졸업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0여 년간 정치적 뜻을 같이한 야당의 실세로 활동해왔다.

역대 정치인 민주화 외길 고집

2000년대 들어 민주화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동국대 출신 정치인들이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정치 활동은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최재성 의원 등이 17대 국회에서 동국대 출신 국회의원의 맥을 잇고 있으며, 강원도지사 김진선 씨 등도 동국대 출신 정치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에서 동국대는 뛰어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우리사회의 큰 변혁을 이끌었다. 민족자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만해 스님을 시작으로, 이후 학생운동을 이끌며 민주화에 앞장섰던 수많은 학생, 그리고 정치인들. 그들이 이처럼 우리 사회에 빛나는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 하겠다’는 동국대 건학 이념이 아직도 남산 코끼리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동국인=민주투사 공식 남겨

동국대 출신 역대 정치인


동국대가 배출한 역대 국회의원 및 당고위 간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의 수는 180여명. 이들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이권에 따라 자신의 정치논리를 쉽게 바꾸는 일부 철새정치인들과는 달리 고집스럽게 한 길로만 매진했다는 점이다.

황명수 씨는 ‘외길을 걸었던’ 동국대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27세의 나이에 조병옥 박사의 밑에서 정치를 배웠던 그는 30여년간 야당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격분해 야당인 민주당에 자원 입당해 33년간 김영삼 씨와 호흡을 맞췄던 최형우 씨도 동국대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김대중 씨의 영원한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씨도 평생을 야당에서 헌신하며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53년 경제학과 졸업하고 민추협 발기인, 평민당 총재 비서실장, 국민회의 최고의원 등을 역임한 권노갑 씨는 한국 정치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동국대 출신 정치인들 중 가장 맏형으로 불렸던 정재철 씨는 1952년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전매청 차장, 한일은행 은행장 등을 거쳐 1981년 정계에 입문했다.

이 밖에도 신순범, 구자춘, 박희복, 박제상 씨 등도 동국대가 배출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90년대를 활약했던 인물이다.

현재 17대 국회의원으로 최재성, 임인배 씨를 비롯해 강원도지사 김진선 씨가 동국대 출신 정치인의 계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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