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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그 전등의 묘업(妙業)-7

기자명 법보신문

소백산의 華嚴會上 신라 넘어 中·日에 영향

자비로우면서 엄격한 스승…오진·지통·표훈 등 10대 제자 남겨
황복사·부석사·추동에서 화엄 강의…『법계도인』 고려로 이어져


<사진설명>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 의상 대사는 소백산에서 처음으로 화엄회상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입니다. 최치원이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온갖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소백산이 같은 봄이구나”라고 찬양했던 뜻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의상은 676년(문무왕 16)에 소백산 부석사를 창건함으로서 화엄대교를 전할 복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절을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전교 활동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일본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파하고 있을 때, 그를 공경한 국왕이 노비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던 일과 의상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들은 진정(眞定)이라는 가난한 젊은이가 그의 문하로 달려가 머리를 깎았던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의상이 소백산에서 밝힌 법등(法燈)이 신라 사회를 두루 비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동문 법장(法藏)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하여,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롭게 하신다고 하오니 기쁨은 더욱 큽니다. 이 로써 여래(如來) 멸후(滅後)에 불일(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법륜(法輪)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습니다. 법장의 편지 또한 의상의 전교활동이 어떠했던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의상은 소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백산에서 밝힌 그 하나의 등불이 열로 백으로 불어나고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무진등(無盡燈)이 되었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는 참으로 큰 인연입니다. 진리가 이로 인해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는 있어도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발심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법. 그러나 의상은 그 이름만을 훔친 스승이 아니었고, 그 제자들 또한 배움만을 취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화엄대교는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부석사에서,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화엄을 강의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의 저서 『법계도(法界圖)』를,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했고, 그리고 법장의 『탐현기(探玄記)』 20권을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40일을 기약하여 강설한 경우도 있고, 장장 90일 동안 강의에 전념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고,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진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우리들 오척(五尺)의 범상한 몸, 이것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임을 깨우치려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 물어 올 때면, 의상은 급히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살핀 다음에 의문 나는 점을 술술 풀어주되, 의문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게 계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상은 제자들에게 항상 훈계했습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의상의 제자 교육에 임하는 참으로 진지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의상은 법장의 『탐현기』 20권을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亮元), 표훈(表訓) 등의 제자에게 각각 5권씩 나누어 강의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에 앞서 10일 동안 문을 닫아걸고 자신이 스스로 탐구·검토하는 성의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탁본으로 인하여 탁이 나오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니, 각기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을 당부하던 의상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승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의상이 제자 교육에 쏟은 정성 못지않게 그 제자들 또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배운 바를 부지런히 기록했으며, 또한 실천에 옮겼습니다. 『지통기(智通記』와 『도신장(道身章)』 등은 제자 지통과 도신이 각각 스승의 강의를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지통기』는 소백산 추동에서 많은 제자들이 운집한 중에 90일 동안 계속된 『화엄경』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승의 말씀만을 기록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스승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울 때, 표훈과 진정은 각각 자기의 견해를 적어 스승으로부터 옳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통은 태백산의 미리암굴(彌理岩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아,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 이를 말씀드려, 이미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인정받아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전해받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훗날에도 계승되어 의상의 몇 대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법계도』를 연구하여,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원통기(圓通記)』 등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고려 때에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기도 했습니다. 의상이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단호하고 엄격한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문도 중에 잘못을 저지른 한 비구가 있어서, 법에 의해 그를 내쫓으니 대중을 떠나 타방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당시 화엄교단의 엄격한 기강을 엿보게 해줍니다.

의상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십대제자는 더욱 유명했습니다.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를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송고승전』 중의 의상전에서는 지통(智通), 표훈(表訓), 범체(梵體), 도신(道身) 등을 등당도오자(登堂都奧者)라고 하면서, 이들은 모두 큰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유라조(迦留羅鳥)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을 특별히 의상의 사영(四英)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응연(凝然)(1240-1321)도 1295년에 지은 『화엄법계의경(華嚴法界義鏡)』에서 “의상에게는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 사영이 있었는데, 이들을 상족(上足)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범체(梵體)는 의상의 직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법융(法融)의 제자로 9세기 전반에 활동한 부석사의 승려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도신(道身)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은 그가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道身章)』 2권을 남긴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책에 지엄과 의상의 문답, 의상과 그 제자들과의 문답 등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도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적(義寂)을 의상의 제자로 보기에는 의문이 따릅니다. 일찍이 신라의 도증(道證)이 유식학의 육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강조한 바 있는 의적은 아무래도 법상종의 승려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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