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 앞만 보고 걸어라

기자명 법보신문
성공한 분의 삶에는 늘 전진만 있어
고집스런 어리석음 있어야 전진 가능


모든 사물의 존재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자의도 아닌 타의에 의하여 던져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태어남도 어머니의 태중 10개월의 고생이 있어 어느 순간에 허허 공간에 던져 진 것이니, 어머니의 처지에서야 날짜도 예측도 하고 병원이든 침실이든 어느 공간을 먼저 정해 놓았을 수 있지만, 태어나는 장본인으로서야 예정이나 기약이 있을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의 톱니바퀴에 얽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태중의 10개월이라는 과거는 알 수 없을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않을 것이다. 곧 앞으로의 전진이지 과거의 회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누구나 앞만 보고 가라 한다. 이런 시간의 진행을 일러 삶의 행진이라 하리라, 곧 살아간다는 것이다.이것이 삶이니 이 삶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긍정적 희망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종점이 될 수밖에 없는 저 긴 미래의 시간에다 기준을 잡아 놓고 보면 이는 살아감이 아니라 죽어감이다.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말보다 죽어간다 함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다만 살아감은 의욕적 희망이지만 죽어간다 함은 절망적 좌절감이 크기에 입에 올리기도 꺼림직한 혐오감이 있기에 주저할 따름이다.

살아가든 죽어가든 간다라는 어의에는 앞이라는 방향적 설정이 전제되고 이 전제된 방향에는 뒤돌아봄은 금물일 것이요, 좌우라는 주변에 지나친 의식을 하는 것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에 충실해 열심히 살라 하면 언제나 앞만 보고 걸어라 하는 지침의 방향타가 필수이다. 그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나 좌우 회고의 주저함은 있을 수 없다. 삶에 보람을 세워 성공한 분의 뒷 이야기에는 언제나 나는 ‘앞만 보고 걸어왔다’는 공통적인 직선이 있다.

그런데 앞만 보고 걷는다 함은 고집스러운 어리석음이 내포되어 있다. 예기치 않은 어려운 일이 앞을 가로막을 지라도 우직하게 밀고 나아가 이를 극복해야 함이니, 어려움을 슬쩍 비켜 서서 옆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을 밀고 가아가야 하니 우직한 고집으로 비치는 것도 당연하다. 흔히 이러한 일을 비유하여 곰처럼 미련하다는 말도 한다. 더구나 오늘의 현실은 세계의 넓은 공간을 평면의 탁자 위에다 놓고 살펴야 하는 넓고도 좁은 세상인데 앞만 본다 함에는 넓이라는 좌우를 무시하게 되니 이 또한 시대 착오의 역행이다.

여기에 옛 선사의 게송이 연상된다.

백운수단(白雲守端)선사가 ‘파리 창을 뚫다(蠅子透窓)’이라는 게송시를 지어,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앞밖에 모르는 어리석음을 경계한 일이 있다.

“빛을 사랑하여 창호지만 뚫으려 하나 / 뚫을 수가 없으니 얼마나 어려우냐 / 홀연히 들어오던 길을 마주 하니 / 비로소 평생에 어두운 시선에 속았음을 아네.(爲愛尋光紙上鑽 不能透處幾多難 忽然撞着來時路 始覺平生被眼瞞)”

앞만 보고 걷는다는 근면 성실이 자칫 햇빛만 보고 창호지를 뚫으려는 어리석은 파리의 나개짓이 될 수도 있음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좌우를 조금만 살펴도 들어올 때 열려 있는 창문의 틈이 있지만 직선적 고집이 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살아감의 현실에는 얼마든지 있겠다. 사리의 분별을 몰라 바로 옆에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앞만 보고 걷는다는 성실성만으로 위안이 될 것인지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한다. 아무튼 세계화라는 오늘의 현실에는 앞만 보고 걷는다는 전통적 성실 위에 옆도 살피는 현실적 문화감각도 매우 중요하다. 앞 선사의 시가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