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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法藏)의 편지 - 12

기자명 법보신문

지엄 모시고 화엄의 바다
함께 헤엄친 진정한 도반

법장이 의상보다 18세 연하
의상 귀국후 書信 우정 이어


<사진설명>중국의 법장 스님이 의상 스님에게 보낸 친필편지. (당현수대사진적 「기신라의상법사서」일본 천리대 도서관 제공)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법장(法藏 : 643-712)과 함께 동문수학했습니다. 법장은 지엄이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 이를 듣고서 입문했는데, 대개 의상이 입실(入室)한 같은 해이거나, 아니면 그 이듬해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법장은 의상보다 18세나 연하였고, 또한 머리를 깍지 않은 세속인이었습니다. 그는 지엄이 입적한 3년 후인 670년에 태원사(太原寺)에서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았는데. 당시 28세였습니다. 법장이 비록 당시에는 출가 이전의 속인이었고, 후배였다고 하더라도 의상이 그와 맺었던 친교는 오래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우정 깊은 것이었습니다. 스승 지엄은 의상과 현수 두 제자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지엄 문하서 함께 동문수학

지엄은 돌아가기 전에 도성(道成)과 박진(薄塵) 두 제자에게 당부했습니다. 대(代)를 잇고 법을 유전(遺傳)할 사람은 오직 법장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지엄이 의상을 제쳐두고 아직 출가도 하지 않은 젊은 법장에게 중국 화엄종의 제3조를 부촉한 것은 결코 법장이 의상 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의상은 어차피 고국 신라로 귀국할 것을 지엄은 이미 헤아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의상은 신라로 귀국했고,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습니다. 지엄의 후계자로는 법장보다 의상이 더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왜 신라로 귀국하고, 법장이 출가하여 지엄을 계승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의문과 관련하여, 지엄 문하는 의상계와 법장계로 분열되고, 법장은 조위(祖位)를 찬탈하여 제3조가 되고 패배한 의상은 신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선뜻 동의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의상이 당나라의 신라 침공 소식을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하게 되자, 법장이 출가하여 지엄을 계승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의상은 신라로 돌아온 이후에도 법장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동문 법장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법장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는 신라 승려 승전(勝詮)의 편에 자신의 저술과 편지와 선물 등을 부처 보냈던 것인데, 대개 697년으로부터 700년경의 일로 추정됩니다. 법장이 의상에게 보냈던 서신의 원본은 지금도 일본의 천치(天理)대학에 전해옵니다.

몇 년 전 저도 이 친필 편지를 배관(拜觀)하는 행운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대구문화방송의 특집 다큐멘타리 의상의 취재를 위해서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1,300년의 오랜 세월에도 이 편지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아직도 묵향이 풍겨오는 듯 했습니다. 법장 친필의 이 편지는 원래 신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이 편지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도 의천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전문이 수록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엄 입적 후 법장이 뒤이어

그런데 이 편지는 11세기 후반에는 송나라에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의천이 송나라로 갔던 1085년에 전해진 것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편지가 베이징의 유리창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16년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타이완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이르렀고, 지금은 일본의 천리대학 도서관에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 서경 숭복사승(唐西京崇福寺僧) 법장은 해동 신라 대화엄법사(大華嚴法師) 시자(侍者)에게 글월을 드립니다.

한 번 작별한 지 20여년,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운(烟雲) 만리에 바다와 육지가 첩첩히 쌓였으니 일생에 다시 만나 뵙지 못할 것을 한하니, 회포 연연하여 어찌 말로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했고 금생에 업(業)을 같이했으므로, 이 과 보를 얻어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하고, 특히 선사(先師)로부터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받았습 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개연천명(開演闡明)해,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를 선양하여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고 또 새롭게 하여 크고도 넓게 이익을 끼치신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더 하고, 이로써 부처님 멸후(滅後)에 불법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法師)임을 알았습니다.

법장(法藏)은 진취(進趣)함에 이룸이 없고, 주선(周旋) 또한 적어,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 (先師)에게 부끄럽습니다. 분(分)에 따라 수지(守持)하고 버리지 않아 이업에 의해 미래의 인연을 맺고자 희망합니다. 다만 화상(和尙)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여, 후인이 그 법문(法門)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미언묘지(微言妙旨)를 자세히 기록 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근일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고향에 돌아가 그것을 그 땅에 전할 것이오니, 청하옵건대, 상인은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당래(當來)에는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몸을 받아 함께 노사나불(盧遮那佛)의 회상(會上)에서 이와 같은 한량없는 묘법(妙法)을 청수(聽受)하고,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보현 행원(普賢願行)을 수행하여 남은 악업(惡業)이 하루아침에 떨쳐버릴 것을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옵 건대, 상인은 과거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고,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존몰(存沒)을 물어주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법장(法藏) 화남(和 南) 정월 28일.

‘삼국유사’ 등에 교류내용 기록

그리고 법장이 따로 봉해서 보냈던 서신이 있었는데, 일연은 이것을 『삼국유사』 「승전촉루조」에 인용했다. 곧 다음이 그것이다.

『탐현기(探玄記)』 20권, 그 중 두 권은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형의장(玄義章)』 등 잡의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疏)』 2권, 『십이문소(十二門疏)』 1권, 『법계무차 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초사(抄寫)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지난 번 신라 스님 효충(孝忠)이 금 9푼을 전해주면서 상인(上人)이 부친 것이라고 하니, 비록 서신은 받지 못했지만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서국(西國)의 군지조관(軍持灌) 하나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살펴 받아주시기 원하며, 삼가 아뢰옵니다.

법장 친필 편지 日, 천리대 보관

이 별폭(別幅)의 서신에 의해, 신라의 승려 효충이 입당할 때 의상은 법장에게 금 9푼을 전한 바 있고, 또 법장은 의상에게 인도의 조관(灌)을 선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도반은 당과 신라로 헤어져 멀리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매우 가깝게 교유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이 법장의 글을 보니, 스승 지엄화상의 교훈이 귀에 들리는 듯하여 이에 문을 닫고 탐구하여 열흘이 지난 뒤에야 바야흐로 나와서 문인 주에서 근기가 좋고 뜻을 쏟을 만한 제자 4명의 영재, 즉 진정 상원, 양원 표훈으로 하여금 『탐현기』를 각기 5권씩 나누어 강의하라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나의 식견을 넓혀 주는 이는 장공(藏公)’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스승의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하는 인연은 큰 것입니다. 특히 바다를 건너서 만난 도반은 더욱 깊은 인연인 것입니다. 진리를 향해 가는 구도자에게 나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경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의상과 당나라의 법장의 교유는 바다도 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화엄경』이라는 대경에 함께 목욕한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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