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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진표 율사

기자명 법보신문

통렬한 참회-정진으로 미륵세상 펼쳐 보이려 했다

쌀 한줌으로 연명하며 정진
죽음 각오한 구도 끝에서
윤회 벗어날 희망 발견

경덕왕의 보살계 수계는
당대엔 흔한 신심의 표현
율사로서 어찌 거절하리

진표(眞表, 718?~?) 율사는 해동 미륵신앙의 비조로 일찍이 중국에까지 명성이 자자해 『송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수록될 정도의 뛰어난 고승이었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출가해 만행과 처절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수기를 받은 이후 수많은 이적과 법회를 통해 평생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교화의 삶을 살았다.

진표 율사는 통일신라 때 태어나고 활동했던 인물이지만 『송고승전』의 기록처럼 오히려 ‘백제인’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가 멸망해버린 백제지역 출신이기도 했지만 평생 권력과 명예를 멀리하고 늘 굶주리고 소외받는 유민들의 곁에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에 의해 본격화된 미륵사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의 민중불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때로는 반란의 사상적 이념이 되기도 했으며, 특히 진표 율사 자신과 그 제자들에 의해 중창되고 세워진 금산사, 법주사, 동화사는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법등을 치켜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불굴의 용맹정신으로 한 생애를 용광로처럼 살았던 수행자 진표 율사, 그를 만났다.

▷열두 살에 출가했으면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인데 그렇게 일찍 출가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많이 했다. 나도 활쏘기를 좋아해 어릴 때부터 산으로 들로 많이 돌아다녔다. 한 번은 개구리를 구워먹으려고 여러 마리 잡아 버드나무에 꿰었는데 갑자기 사슴이 나타나 들고 있던 개구리들을 물속에 내팽개치고 사슴을 뒤좇은 적이 있다. 다음해 우연히 그 근처를 갔을 때 어디선가 개구리들이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내가 꿰어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개구리들이었다. 나는 순간 깊은 충격과 죄책감에 빠졌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풀어주고 출가를 결심했다.”

▷요즘도 출가한다면 반대가 심한데 부모님께서 쾌히 승낙하셨나요?
“물론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집에 머물러 있는 한 욕망의 바다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고, 계속 반대하면 깊은 산으로 도망가 스스로 머리를 깎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 각오로 내가 거듭 출가의 뜻을 말씀드리자 부친께서는 할아버님과 깊이 의논하시더니 마침내 허락해주셨다. 나는 눈물로 두 번 절을 드리며 반드시 큰 깨달음으로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다.”

▷스승이 숭제(崇濟) 법사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셨나요?
“은사께서는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 스님에게 배운 바 있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으로부터 오계를 받았던 고승이셨다. 그 분께서는 어린 내게 『점찰선악업보경』을 건네주시며 ‘지장보살님과 미륵보살님께 간절히 참회해 친히 계법을 세상에 전하라’고 당부하셨다. 돌이켜보면 그 분은 내가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한 뒤에야 성불하겠다고 비원을 세웠던 지장보살님처럼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10년간 운수행각을 한 뒤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 하필 그 위험한 곳을 선택하셨습니까?
“나는 나의 참모습을 찾으려 오랫동안 떠돌았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천길 낭떠러지에 움푹 파인 부사의방,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그곳은 죽을 각오로 불꽃 튀는 삶과 마주할 수 있는 수행처였다.”

▷그곳에서 어떻게 정진하셨습니까?
“한 주먹의 찐 쌀로 하루를 연명해가며 미륵·지장 두 성인께 수기(授記)를 받으려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1년이면 업장 두터운 중생도 수기를 받을 수 있다고 스승께서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나는 끝 모를 절망에 빠져들었고 결국 절벽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절망의 밑바닥에 희망이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를 들어 부사의방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나는 확신과 용기를 얻어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삼국유사』 등 옛 기록에 보면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피눈물 나는 고행을 하셨다는데요?
“육체적 고통과 두려움은 내 간절함 앞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몽땅 부처님께 바치기로 했다. 내 두터운 업장과 식을 줄 모르고 꿈틀대는 욕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친 돌바닥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오체투지를 하며 참회했다. 피가 뚝뚝 흐르더니 3일 만에 팔다리의 뼈가 부러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절을 올렸다. 7일이 지나자 지장보살님께서 현신해 내 몸을 원래대로 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참회의 눈물로 절을 해나갔다. 그렇게 21째 되던 날 마음의 눈이 열렸고 마침내 미륵보살님으로부터 수기와 189개의 간자도 받을 수 있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뒤에야 비로소 새 삶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님께서 생명까지 내던지면서 그토록 갈구하고 소망하셨던 게 무엇이었습니까?
“개구리를 꿰었던 것도 나였지만 꿰어진 개구리도 나였다. 굶주리고 핍박받는 백성들이 나였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 또한 나였다. 인과응보의 굴레, 그 속에서 내가 참다운 부처를 찾을 때 개구리도 백성들도 참다운 희망을 발견하고 억겁 윤회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스님께서 부사의방에 내려오실 때 수많은 민중들이 열렬히 환호했고 심지어 선남선녀들이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아끼는 담요를 펴 놓아 밟게 했을 정도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희망과 자유를 보았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실재함을 보았으리라. 마치 내가 그랬듯이….”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들을 교화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점찰선악업보경』을 근거로 여는 법회다. 이 경전은 말세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을 대신해 지장보살님께서 설법한 내용으로 나무쪽을 던져 길흉선악을 점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고 계를 받도록 하기 위한 법회다.”

▷스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주고 이를 지킬 것을 강조하셨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보살계를 주어 대승보살도를 실천토록 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신라가 미륵께서 하생하기에 적합한 불국토로 정화돼 자타가 모두 함께 불토를 성취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밑바탕은 참회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다.”

▷미륵불을 조성할 때면 석재나 목재로 사람 크기로 조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스님께서는 금산사 미륵전을 조성하면서 33척 높이의 철불을 모셨습니다. 또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민중의 원력이 담긴 부처님을 모시고 싶었다. 실제 그때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호족들은 무기를 가져오고, 농민들은 농기구를 녹여 불상조성에 참여했다. 그 미륵부처님은 한 많고 고통 받는 민중들의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경덕왕께서 스님의 명성을 듣고 궁중으로 초청해 보살계를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덕왕이 스님과 밀착했다고도 하고 반대로 경덕왕이 스님의 신앙운동을 회유하려 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삐딱하게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 나는 백제 유민인 동시에 신라인이다. 왕께서 보살계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당시 대표적인 율사였다. 율사가 보살계를 주는 것에 무슨 의도가 있으며, 신심 깊은 왕의 도움으로 승려가 불사를 일으키는 게 어찌 이상한가.”

▷훗날 견훤이나 궁예, 정여립 같은 분들이 ‘진표 미륵’의 후신임을 자처해 반란을 꾀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스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늘 강조했던 것이 계율 아닌가. 계율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지혜를 밝히는 일이다. 거기에서 어찌 권력쟁취와 투쟁이 합리화될 수 있겠는가.”

▷그럼 스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무엇인가요?
“신라는 골품제의 영향으로 어느 집안에, 무엇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선천성의 문제가 보다 강조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실천의 문제다. 나는 미륵보살의 하생을 앉아 기다리는 대신 통렬한 참회와 피눈물 나는 정진으로 미륵보살에게 다가갔다. 또 그 분의 간자에 의해 대승보살도를 실천할 수 있음을 일평생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내가 꿈꾸던 세상, 그것은 모두가 미륵불을 희망하고 미륵이 되는 ‘미륵의 세상’이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진표율사 어록

“삼계(三界)의 길은 불안하고, 군생(群生)과 함께 살아 구별이 없습니다. 오늘 이후에는 비록 세상에서 만나 뵙기 어려워도 깨달음을 얻는 날에는 한 곳에서 (부모님과 제가) 서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송고승전』

후대의 찬탄

“말세에 나타나서 몽매한 사람을 깨우치니 영악(靈岳)과 선계(仙界)가 감응하여 통하였도다. 탑참(搭懺-선악 두 글자를 던져 점을 치며 하는 참회법)을 전하기 위하여 높은 정성을 다했다고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은 물고기와 자라도 교화하였도다.”
(고려 일연 스님)
“정법을 구하기 위하여 내 몸과 마음을 내던지고 돌아보지 않는 대용맹심으로써 발원하였고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현신로부터 수기를 받아 신라사회를 크게 교화한 인물이 진표율사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진표는 교학보다 참회와 수행에 몰두했다. 아마도 그는 발전의 밝은 전면 뒤에 어른거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누구보다도 먼저 보았던 것 같다. 진표,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진정 종교가다운 고승이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참고자료
찬녕 『송고승전』, 일연 『삼국유사』, 채인환 『한국불교계율사상연구』, 김상현 『신라의 사상과 문화』, 홍윤식 「신라시대 진표의 지장신앙과 그 전개」, 조용헌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불교춘추9」(1997.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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