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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국 근대불교의 시작은 언제일까

기자명 법보신문

“日 불교계 별원 설치된 1877년이 근대불교 출발”

이동인 등 개화승 활동-승려 도성 출입 계기
억불로 침체됐던 국내 불교계에 기폭제 역할


우리 근현대불교사는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아픈 기억을 가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억불정책으로 일관하였던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근대사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그 후유증으로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도 많은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 근현대사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조명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

필자는 많은 분들의 질책을 달게 받을 각오로 광복 60주년을 한 해 지난 현 시점에서 개항기부터 20세기를 마감하는 시기까지의 근현대불교사를 정리 해 보려는 만용을 부려 보고자 한다.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 불교사에서 근대의 시작은 언제로 보아야 할까. 근대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다. 서구에서 근대 사회는 시민의 힘으로 중세 절대 왕정을 타도하고 근대 국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의 특징은 중세 사회의 종교적 권위에서 인간 해방이 이루어졌고, 신의 뜻보다도 사람의 뜻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도시가 발달하고 그와 더불어 노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근대의 특성으로는 세속화를 들 수 있다. 종교에서 세속화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신화와 거룩한 상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불교사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언제부터 나타날까 하는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시작은 서구처럼 농민전쟁이나 시민혁명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는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의 강압에 의해서 봉건사회의 문이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내부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후유증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앞서 이야기한 근대화의 특성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문호가 개방되고 나서 한참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만 근대의 시작을 그 때로 잡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처음으로 단초가 마련된 시점으로 잡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사에서 근대의 시작을 이야기 하려면 먼저 조선후기 불교계의 상황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불교는 탄압을 받아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승려들은 도성출입도 할 수 없었고, 고된 노동이었던 산성축조와 수비에 급료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먹을 양식과 의복 그리고 땔나무 등을 스스로 부담하여야 했다. 뿐만 아니라 힘든 과정과 노동력이 많이 드는 한지를 제조하여 공납으로 바쳐야 했고 산나물·꿀·미투리 등을 납부하는 고된 잡역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승려들은 양반과 아전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감내하여야 했다.

조선왕조 정부의 이러한 탄압에 맞서 불교계는 저항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탄압이 극심했던 1664년(현종 5) 충청도 서천에서 감사 이익한(李翊漢)은 관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승려들을 잡아 가두었다. 승려들이 조총과 활 등으로 무장하고 관에 맞서 항거한 천방사(千房寺) 사건이 있었다. 같은 현종 연간에 백곡 처능(處能)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불교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간폐석교소는 8천여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문으로 유교 경전과 고사를 인용하여 불교 탄압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후에 처능은 팔도선교16종도총섭이라는 불교계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상소문이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조정의 주목을 끌었던 것 같다. 숙종 연간에 와서는 경기도 양주의 승려 여환(呂還)이 주도한 미륵신앙사건과 금강산 승려 운부(雲浮)를 중심으로 한 거사 모의 등은 국가의 불교 탄압정책이 지나치게 부당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불교계의 수난은 근대 사회에서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근대의 시작은 역사학에서 있어서도 학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불교사에 있어서 근대의 시작을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다. 대한제국의 성립 시기인 189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불교계의 변화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나서 실시된 광무개혁은 정치·경제·외교·사회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전제군주제를 택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양전사업(量田事業)이 실시되어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정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졌다. 외교적으로는 열강들의 세력 각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세력균형정책을 취하였다. 사회적으로도 근대적 호적제가 마련되고, 사회복지기관으로 제중원(濟衆院)과 혜민원(惠民院) 등이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불교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안이 제시된 것이 없다.

불교계의 개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에 가서 나타난다.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설치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실시할 개혁안 가운데 승니(僧尼)의 도성출입금지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안은 1894년 말에 군국기무처가 폐지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1895년 도성해금을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도성해금은 결정된 이후로도 몇 번이나 번복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므로 적절한 견해는 아닌 것 같다.

도성해금은 1895년 일본 정토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사노가 도성해금을 건의한 이면에는 일본 정토종으로 하여금 조선 포교에 주도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 불교 한 종파의 야심을 드러낸 이 사건을 두고 조선불교계의 지도급 승려들 가운데는 사노에게 너무도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승려들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도성해금을 근대의 기점으로 설정할 경우 이 보다 앞서서 개화파와 연결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승려인 이동인(李東仁)과 탁정식(卓挺埴)의 행적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동인은 개화파의 주역이었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화파 인사들은 서대문 밖 봉원사와 동대문 밖 화계사에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책을 읽었다. 개화파 인사들은 봉원사에서 이동인(李東仁)을 만나 근대 문물을 접하였다. 이후 개화파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은 이동인은 일본으로 밀항하여 서구의 근대 사상이 담긴 서적 등을 소개하였다.

이동인은 유대치·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의 도움으로 1879년(고종 16) 6월 부산을 경유하여 일본에 밀항, 교토(京都)의 혼간지(本願寺)에 10개월간 체류하면서 변모된 일본 사회를 살피고 도쿄(東京)로 가서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하였다. 1880년 수신사로 왔던 김홍집(金弘集)을 만나 그의 신임을 받게 된다. 이동인은 귀국하여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을 알게 된다. 민영익의 사랑방에 거처하며 그의 주선으로 국왕을 배알하고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상주하여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1880년 10월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조약체결의 알선을 요청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밀파되어, 사명을 마친 뒤 1개월간 동경에 체류하면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석하며 일본의 지도자와 접촉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앞으로 미국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위하여 미리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은 그 뒤 1882년 1월 김윤식이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과 조약내용을 검토할 때 기준이 되었다. 이동인은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이라고 하는 일본시찰단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해 3월 참모관으로 이원회(李元會)와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총포와 군함 구입의 임무를 받았으나 출발 직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는데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탁정식(卓挺埴)은 법명이 무불(無不)인데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난 이후로 개화당의 일원이 되어 이동인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이동인이 하여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이후 이동인이 실종되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선발대 13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무불은 김옥균의 청으로 울릉도 목재 운반을 위해 배를 구입하고자 고배(神戶)로 갔다가 병을 얻어 급사함으로써 개화승들의 활동은 끝이 나게 된다.

불교계 근대 출발점을 역사학의 보편적인 설을 준용하여 개항된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개항과 더불어 바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개항은 아직까지 봉건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조선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개항은 조선사회가 근대 사회로 변모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 불교의 조선 상륙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본 불교 세력은 정치권과 긴말한 관련을 가지고 조선에 침투하였다. 일본의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과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는 정토 진종 본원사파 관장 겐뇨(嚴如)에게 조선개교를 종용하였다. 정토 진종은 막부 정권으로부터 300여년간 음으로 양으로 비호를 받아왔다.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어 천황제가 성립하자 지난날 적대 세력이었던 정권과 타협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원사파는 북해도와 쿠릴열도 개척, 중국과 조선의 해외 포교에 나서게 되었다. 1877년에 겐뇨는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헤이스이(平野惠粹)를 조선에 파견하여 부산·원산·인천·경성·목포 등지에 별원(別院)을 설립하고 포교를 시작하게 하였다.
 
근대의 출발점을 서구의 충격으로 조선사회가 변모하는 계기로 본다면 우리 불교 근대의 시작은 개항 직후에 일본 불교 세력이 별원을 설치하고 포교를 시작한 시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김순석 박사는

1960년생.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순천향대, 중앙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독립기념관 연구원, 대한불교 조계종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으로 조계종 불학연구소 연구위원을 겸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2002), 「통감부시기 불교계의 명진학교 설립과 운영」(2003),「박은식의 대종교 설립운동」(2004) 등이 있으며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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