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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한 의상 - 16

기자명 법보신문

인간의 존엄 주창하며 국왕의 노비 보시 거절

<사진설명>의상 스님 진영. 경북 영풍군 부석사 소장.

여래장사상은
평등 이념

지통·진정도
하층민 출신
불법에 차별 없어

의상 스님
성기사상
인간존엄 강조

불교의 교리에는 인간평등의 이념이 두루 깔려 있고, 또한 불교교단의 모든 성원은 평등의 원칙 아래 있었습니다. 갖가지 다른 신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불교교단을 형성했을 때, 브라만들이 비난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브라만이 최상의 종족이요, 나머지는 미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큰 강물이 있다. 그러나 그 강물들이 큰 바다에 이르고 나면 앞의 이름들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大海)라고만 불린다. 이와 같이 너희들도 출가 전에는 귀족이었거나 브라만이고, 바이샤·수드라의 어느 편이었건 간에 출가하여 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옛날의 계급과 이름은 없어지고 석가모니를 신봉하는 사문이라는 이름으로 평등하게 불린다.” 카스트제도 아래에서 인간의 평등을 밝힌 부처님의 이 선언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골품제도가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출신성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특권과 제약이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불교의 평등이념이 골품제도가 시행되고 있던 신라의 정치 및 사회 전반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고승들은 평등사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고, 불교 교단 내에서는 평등의 이념이 지켜지고 있었던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계에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계통의 경론이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본래부터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여래장사상은 불교의 평등이념과 연결되는 것인데, 원광과 원효, 그리고 의상 등과 같은 학승들은 여래장사상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이외의 많은 학승들도 불교의 평등사상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임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골품제가 시행되고 있던 불평등사회 속에서 평등사상을 접하고 이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승려들 가운데 신분제적인 구속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골품제의 특권이나 제약이 출가 승려에까지 따라다니던 그림자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출가에는 신분의 제한이 없었고, 수행에 의해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법회나 불사에 참여하는 신도의 경우에도 신분에 의한 제약이나 특권이 부여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라에서도 신분이 출가에 장애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통(智通)은 노비 출신이었고, 진정(眞定)의 신분도 귀족은 아니었습니다. 지통은 이랑공(伊亮公)의 가노(家奴)였습니다. 진정은 군대에 속해 있었고,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에 복역하면서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신분을 귀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에는 더 이상 신분이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들은 모두 출가 이전의 성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임을 뜻하는 석씨(釋氏)를 관칭(冠稱)했습니다. 비록 낮은 신분 출신일지라도 수행을 쌓아 고승이 되었을 경우,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혜공(惠空)과 사복(蛇福)은 훗날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에 봉해질 정도로 고승들이었습니다. 사복에 관한 자료는 설화적이기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이 될 때까지 말도 못하고 일어나 걷지도 못했던 그의 신분을 귀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혜공은 천진공의 집에서 고용살이 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였습니다. 우조는 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7살 때 주인의 몹쓸 종기를 쉽게 고쳐준 일이 있습니다.

장성해서는 주인의 속마음을 헤아려 아는 등의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이에 주인 천진공이 우조에게, “나는 지성(至聖)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음을 모르고 광언(狂言)과 비례(非禮)로 욕했으니, 그 죄를 어떻게 씻겠습니까? 이후로는 원컨대 도사(導師)가 되시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자기 집의 젊은 노비에게 절하며 도사가 되어 자기를 인도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천진공의 태도에는 신분보다 종교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아무튼 노비출신의 우조는 출가해서 혜공이 되었고, 혜공은 고승으로 알려졌던 것입니다.

의상의 10대 제자들은 모두 성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그들의 평등이념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실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단 내에서는 평등의 이념이 실현되고 있었으니, 골품제사회에서 불교는 그 완충적 역할은 했던 것입니다. 의상의 출신 성분, 즉 그의 출신이 진골귀족이었다고 해서 그가 전개한 화엄사상이나 신앙이 신라의 전제주의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출가 이전 의상의 신분은 진골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그에게 신분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상은 귀족계층을 특별히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의상이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하면서 교화하고 있을 때, 그를 존경하던 국왕이 토지와 노비를 베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의상은 이를 거절하면서 국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불법(佛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함께 균등하고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전장(田莊)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로써 집을 삼고 바릿대로 농사지어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이 이를 의지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의상의 이 말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한 것이고 동시에 법신 혜명을 잇고자 했던 그의 근본 뜻을 표명한 것으로 주목됩니다. 골품제가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던 시절에, 그것도 국왕의 호의를 거절하면서까지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스스로 이를 실천한 의상의 모습은 의연하고 당당합니다. 신라시대 사원에는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모가 큰 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많았습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의상의 이러한 태도는 매우 용기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강조했습니다. 법계로서 집을 삼고 바루로 농사짓지만, 이처럼 소박하고 간소하게 살아가기에 법신 혜명이 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웅변이고 큰 법문입니다.

의상은 또 제자들에게 오체불(吾體佛)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오척(五尺) 범부의 몸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의상은 “금일 내 오척의 몸을 이름 해서 세간(世間)이라 하는데, 이 몸은 허공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고, 또 “내 범부 오척의 몸이 삼제(三際)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주(無住)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은 연(緣)으로 된 오척이므로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가 되고 많은 것이 필요할 때는 많은 것이 된다.”고 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기사상(性起思想)에 토대한 것으로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단장했습니다. 특히 21년(681)에는 도성(都城)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은 국왕에게 글을 보내 간했습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며,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기나긴 성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는 일보다는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의상의 건의를 왕이 수용하여 곧 공사를 중지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의상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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