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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혜초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 넘나들던 서역의 길은 ‘나’를 들여다보게 한 거울

문화-가치관 다르다고
미개인 취급 하는 것은
오만과 편견일 뿐

내가 귀국하지 않은 건
그리움 넘어서야 하는
수행자 직분 충실한 까닭

1908년 3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폴 펠리오는 중국 돈황 천불동에 오래된 두루마기 필사본의 여행기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혜초 스님이 수만리 서역보다 먼 망각의 강을 건너 우리 곁에 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계 4대 여행서의 하나로까지 평가 받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704?~780) 스님은 신라가 고향으로 16세 때 원광, 자장, 원측, 의상 스님 등이 그러했듯 서해를 건너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인도인 금강지 스님으로부터 밀교의 정수를 익힌 혜초 스님은 스승의 권유에 따라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멀고도 험난한 인도 구법 여행의 길에 나섰다. 그 때가 723년, 스님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스승이 중국 땅에 온 길을 따라 광주에서 배를 타고 동천축에 도착한 후 부처님의 숨결이 남아있는 성지를 찾아 순례한 후 멀리 아랍까지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살을 에는 고원의 추위와 사막의 가마솥더위, 거기에 맹수와 도적들로부터의 위험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스님은 마침내 4년간의 인도 및 서역 대장정을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왔다. 그곳의 서울인 장안에서 스승 금강지와 그 제자 불공삼장으로부터 오랫동안 밀교를 공부한 스님은 스승의 부촉에 따라 대중교화와 경전번역에 일생을 보내며 780년 4월 15일 마침내 오대산에서 입적했다.

한 평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불세출의 순례자, 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스님, 그를 만났다.

▷스님을 흔히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평가하고는 합니다. 지난 1999년에는 문화관광부가 지정하는 이달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고 세미나를 비롯해 각종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새삼 1000년의 세월을 넘어 이렇게 주목받으니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내가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글쎄.”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함께 하는 정신, 이러한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이 세계인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란 마음이 빚어낸 결과다. 다른 이들보다 많은 곳을 여행했다고 해서 낯선 문화를 경험했다고 해서 세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음의 작용을 구석구석 이해하고 그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 참다운 세계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마음이 세계고 그대의 마음이 온 우주다.”

▷당시 불교계에는 화엄, 유식, 정토, 선(禪) 등이 주류였을 듯싶은데 어떻게 밀교승의 길을 걷게 되셨습니까?
“의상 스님에 의해 화엄이 활짝 꽃피었고 중국 현장법사의 영향으로 신라에도 유식사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었다. 하지만 치밀하면서도 방대한 교학의 체계는 성불(成佛)이 대중들과는 거리가 먼 출가자의 영역이라는 괴리감을 낳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전의 주석에만 열정을 쏟아 붓던 부파불교시대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밀교는 진언, 수인(手印), 관법, 만다라, 의례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들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두터운 업장을 소멸토록 이끈다는 점에서 참다운 대승불교라고 확신했다.”

▷그러면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갈 때부터 인도에서 온 중국 밀교의 개조 금강지 스님을 찾아가실 목적이었군요.
“그렇다. 이미 신라에는 의림 스님 등에 의해 밀교가 전해졌지만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훗날 최치원 선생이 얘기했듯 무릇 길이란 멀다고 못 가는 법이 없고 사람에게는 이국(異國)이 따로 없지 않은가.”

▷당시 중국 유학이 유행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바다를 건넜지만 그렇다고 인도로까지 구법을 떠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굳이 인도로 향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스승께서는 내게 인도로 떠날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고 나는 그 뜻을 따랐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비로소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라는 것이 스승의 뜻이었음을 알았다. 이역만리에서 만난 분들과 다양한 신앙형태는 나와 내 종교관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고, 그 거울을 통해 나는 내 자신뿐 아니라 불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았다.”

▷그렇더라도 여행기록까지 남겼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언어로 진실을 모두 드러낼 수 없을뿐더러 타인의 경험이 내 것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려주고 싶었다. 또 풍습이나 가치관이 크게 다르더라도 본질적인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음도 얘기하고자 했다.”

▷왕오천축국전은 여행기라는 점에서 대당서역기 등 당시 여행기와 비슷할 수 있지만 스님 자신의 시를 포함시킨 것을 비롯해 향수, 고난, 무상 등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느끼는 여행’ ‘서정적 여행기’라고 평가한 이도 있는데 이렇게 독특하게 쓰신 이유가 있습니까?
“스승께서는 그곳 사람들의 언어와 생활모습을 잘 관찰하고 거기에서 느끼고 배우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그 나라의 위치,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음식, 의상과 풍습, 언어와 종교 등에 대해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서술하려 했다. 또 현장 스님이야 황제의 명을 받아 『대당서역기』를 쓰셨기에 일정한 의무와 격식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데서 자유로웠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서역지방의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했던 게 사실인데 직접 가보니까 어땠습니까?
“예(禮)와 인(仁)을 모른다고 미개한 것인가.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하여 불쌍하고 어리석다고 할 것인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다니거나 몸에 재를 바르고 다니는 사람들,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는 부족들, 산나물로 목숨을 연명해가는 사람들. 그야말로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네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보살과 극락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군가 잘못했더라도 벌금을 물릴 뿐 때리거나 죽이는 형벌이 없는 나라가 많고 한 나라의 왕도 수행자를 보면 땅바닥에 내려앉아 법을 청했다.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며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나라가 많았다. 내 잣대만을 고집해 어찌 그들을 미개하다고 할 것인가.”

▷다니면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을텐데요.
“나보다 훨씬 먼저 서역에 다녀왔던 법현 스님은 ‘하늘에 나는 새가 없고 땅위에 뛰는 짐승이 없다. 멀리 보아도 눈 닿는 데가 없고 갈 곳을 알지 못한다. 다만 죽은 자의 해골이 표적이 될 뿐이다’라고 했다. 정말 길을 알 수 없어 앞서간 분들의 뼈를 이정표 삼아 가야 했던 때도 많았다. 그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은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의 나가라다나 절에 갔을 때였다. 중국의 한 스님이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또 평화로운 불교국가에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국토를 황폐화 시킨 모습을 볼 때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스님께서 서역에서 돌아온 후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기우제를 지내셨고, 또 기우제가 끝나니까 명주실 같은 비가 왔다고 전합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스님은 ‘신통력’에 있어서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내가 기우제를 지냈던 것 황제의 명령이나 내 신통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오랜 가뭄에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비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중생들의 지극한 바람과 불보살님의 가피 때문이리라.”

▷왕오천축국전에는 고향 신라를 그리워하는 시가 있는데 왜 당나라에서 50년 넘게 살면서도 귀국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우도 죽을 때면 자기가 태어난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했다. 내 그리운 고향 신라,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리움을 넘어서야 하는 출가자다. 신라에 많은 스님들이 오셨기에 내가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밀교는 널리 퍼질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경전 번역을 통해 불교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 그것이 내 역할이었고 거기에 마지막 한 호흡까지 최선을 다하려 했다.”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스스로를 채찍질해 끊임없이 노 저어 나아가려 하라. 젊다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뛰어들 수 있다는 열정을 일컬음이다.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 나를 둘러싼 고정관념과 속박을 틀을 과감히 부수라.”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한정섭 『왕오천축국전』, 지관 스님 「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 김상영 「혜초의 구법행로 검토」, 여성구 「입당구법승과 입축구법승에 대하여」 등


혜초 스님 어록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오./ 다만 멀고 험한 길 근심되지만/ 업장의 바람 휘몰아침도 두렵지 않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그 구름 편에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은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따뜻한 남쪽에는 기러기 오지 않으니/ 누가 내 고향에 날아가 소식 전하리.’


찬탄과 공경

“혜초 스님은 동방의 인류를 위한 일념으로 멀고도 험난한 인도 구법 여행길에 나서서 이를 원만하게 성취했다. 혜초 스님의 후예인 우리는 지금 자체나 『왕오천축국전』에 대해 너무나도 어두운 부끄러운 후예라고 자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관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왕오천축국전』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여행기다.” (고병익·전 서울대교수)

“혜초 스님의 서역기행은 분명 희세의 거룩한 장거이며, 그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이자 우리의 국보급 진서이고 불후의 고전으로서 커다란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수일·문명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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