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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법회’ 의기투합엔 장애가 없죠

기자명 법보신문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 지 현 스님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 최 명 숙 씨

<사진설명>지현 스님과 최면숙 씨가 청량사 홈페이지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3년 가을, 부쩍 짧아진 해가 벌써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다. 산사의 해질녘이란 것이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으니, 아직 경내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참배객들도 서둘러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두운 산길 조심해서 내려가길 바라며 참배객들의 뒷모습을 살피고 있던 스님 눈에 막 계단을 올라 절 마당에 들어서는 사람이 띄었다. 다 늦은 시간, 그나마 얼핏 보기에도 편한 몸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왔을까 싶었지요. 젊고 건강한 사람들도 30분은 걸어 올라와야할 산길인데, 걸음도 불안하고 몸 가누기도 그리 편치 않아 보이는 여자 분이 올라오셨으니 눈길이 갈 수밖에요.”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에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말을 건넨 것이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따듯한 차 한 잔을 나누고 땅거미가 짙어진 밤길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스님은 오래도록 걱정을 놓지 못했다.

마음으로 건넨 따뜻한 차 한잔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 지현 스님과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 최명숙 씨는 마주앉자마자 청량사 이야기부터 꺼낸다. 지난 3천배 철야정진은 어땠는지, 도반 누구누구는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청량사 어디에 여름 꽃이 보기 좋게 피었는지 등등. 서울 한 복판 도심에 앉아서도 두 사람 마음은 순식간에 청량산 자락으로 달음질치는 듯하다.

인연이란 참 기인한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지현 스님은 영주장애인복지관 재위탁 문제를 놓고 장애인들과 때론 마찰을, 때론 양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최 씨가 나타났으니 그냥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뇌성마비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최 씨도 청량사를 찾을 계획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안동에 형제 5명이 모두 장애인인 가정이 있어서 방문차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안동에 내렸는데, 갑자기 청량사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절인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청량사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산길을 올라가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은 법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어요. 감동에 떠밀리듯 그렇게 숨 가쁘게 절에 들어서는데, 법당 앞에서 스님이 내려다보고 계셨어요. 그때는 스님이 장애인복지관 관장이라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최 씨를 붙잡은 것은 스님이 내민 차 한 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 씨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나 사찰을 찾는 ‘이름만 걸쳐 놓은’ 불자였다. 나름대로 이유도 있었다. 사찰이 대부분 산중에 있다 보니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고, 전생 등에 관한 경전말씀이 마치 장애를 전생의 죄로 여기는 것 같아 그리 탐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어느 사찰을 가도 이렇게 스님이 스스럼없이 반겨 맞아주며 차 한 잔 내미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최 씨는 그날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청량사를 찾았다. 매달 열리는 철야 3천배 정진에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3년이 다 되도록 이어지고 있다. 폭설이 내려 길이 끊긴 두어 번을 제외하고는 3천배 정진을 거른 적이 없다. 그런 최 씨를 보면서 옷깃을 여미는 것은 지현 스님이다.

“어릴 때 출가해서 철없는 시절을 놀며 보내고 나니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런데 법련화(최명숙 씨의 법명) 보살님을 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어요. 불편한 몸으로도 서울과 청량사를 오가며 저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뼈저리게 되짚어 보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게는 참 무섭고도 큰 스승입니다.”

“저도 스님을 만난 이후에 세상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어요. 긍정적이고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은 했지만 약간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거든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느끼는 위축감 같은 거였지요. 그런데 스님을 만나면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낼 수 있었어요.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이것은 되는 일이다’하는 결단력이 생기도록 도와주셨어요. 또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게 됐구요.”

불편한 몸으로 3천배 정진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지 이제 겨우 3년밖에 안됐는데, 그 사이 의기투합이 단단히 이뤄졌다. 장애인 법회를 만드는 것이다. 스님이 장애인복지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 씨가 복지회 홍보담당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려니 쉽지가 않다. 산사는 고사하고 도심 포교당조차 장애인 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선뜻 자리를 내주겠다는 사찰도 없다. 스님이 애를 태우는 사이 속을 졸이기는 최 씨도 마찬가지다.

나를 경책하는 큰 스승

“장애인 법회 모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진행이 느려서 스님한테 죄송해요.”

“그래도 법련화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법련화하고 내가 계속 노력해야죠. 우리 둘은 그 불사를 위해 만난 인연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출생으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실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고 행실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는 「숫타니파다」의 말씀처럼 사람의 향기와 존귀함은 출생으로, 그 겉모습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습과 그 발자취가 귀한 그림으로 남는 것이다. 육안(肉眼)을 잃고 비로소 심안(心眼)을 얻은 아나율 존자처럼 눈으로 보이는 모습을 거둬내고 마음으로 서로를 만난 두 사람은 아름다운 회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귀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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