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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속명 다 버리고 창씨개명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06.08.11 18:57
  • 댓글 0

8.15특집-일제하 불교계 지도자 창씨개명 현황과 분석
교계 3360여명 창씨…창씨개명상담소도 운영

만해-운허-효당-백성욱-김법린은 끝내 안바꿔

1939년 11월 일제는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 대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로 바꾸는 법령을 제정한 뒤 다음해인 1940년 2월부터 이를 강력히 시행했다.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바로 그것. 조선총독부는 관민을 동원해 협박과 강요로 밀어붙였고 이를 따르지 않을 때에는 자녀들의 입학거부, 식량배급 제외, 노무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는 등 온갖 제재를 가했다.

불과 6개월 만에 조선인의 80%가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것도 일제의 잔학한 식민지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창씨개명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양한 성향이 나타난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완전히 바꾼 경우, 절반만 일본식으로 한 경우, 형식상 일본식으로 바꾸는 경우 등. 그렇다면 당시 불교계는 어땠을까?

◇불교계 창씨개명 현황=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감수해야 할 박해는 불교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찰주지나 공적인 활동이 극히 어려웠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수계증조차 받을 수 없었다. 혜봉 스님의 『친일불교론』 ‘일제하 조선승려의 창씨개명 명단’에 따르면 본명과 창씨명이 밝혀진 명단만도 259명이고, 창씨명만 있고 본명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무려 3100명에나 이른다. 산속에서 홀로 정진했던 일부 수행자를 제외하고는 불교계 대다수가 창씨개명을 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교계가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부응해 적극적으로 창씨개명 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시내 5곳에 창씨개명상담소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특히 서울 A암자 주지 스님은 무려 215명을 창씨개명하는 엄청난 성과(?)를 자랑하기도 했다. 또 많은 불교계 인사들이 잇따른 시국강연을 통해 창씨개명을 비롯해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게 현실이었다.

◇불교계 창씨개명의 세 유형=먼저 성과 이름을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꾼 경우다. 대표적인 친일행위자로 30대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과 수원 Y사찰 주지를 역임한 강대련은 이하라 가오루(渭原螢)로, 고액의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헌납했던 서울 B사찰 주지 강성인은 하나다 요시기치(花田芳吉)로, 종정 사서실장으로 친일행위를 했던 허영호는 도쿠미쓰 쓰바사(德光翼)로, 문경 G사찰 주지 곽기종은 니시하라 유이치 등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법명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꿨다.

또 창씨를 일본식으로 하거나 개명을 일본식으로 한 경우도 있다. 경남3본산종무협회 회장을 지낸 박원찬은 아라이 엔산(新井圓讚)으로, 조선불교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로, 경주 G사찰 주지 최상문은 마루야마 쇼분(丸山翔文) 등으로 창씨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 유형으로 본관이나 지역 등을 응용해 창씨개명한 케이스다. 전 동국대 총장 권상로는 본관을 살려 안도우 소로(安東相老)로, 전 동국대 교수 김동화는 가네가와 도카(金河東華)로, 하동 S사찰 주지 장도환은 하리모도 도칸(長本道煥)으로, 고성 Y사찰 주지 박대륜은 부처님을 따른다는 의미로 샤쿠무네 다이린(釋宗大輪)으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수원시사편찬위원회 한동민 전문위원은 “창씨개명을 어떻게 했느냐가 곧 친일행위의 정도와 직결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창씨개명의 내용은 식민지 정책에 대한 당사자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창씨개명 거부한 인물들=창씨개명을 했다고 모두 친일파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원 다수도 창씨개명을 했으며 공적인 활동을 위해 부득이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했던 불교계 인사들 또한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을 비롯해 이운허 스님, 만당과 조선어학회사건을 이끌었던 김법린 선생,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창간에 기여했던 백성욱 박사, 25년간 독립운동을 했던 효당 최범술 스님 등이다.

특히 만해는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창씨개명과 관련한 일화도 여럿 있다. 한 번은 벽초 홍명희가 만해를 찾아와 “최린,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했답니다. 이런 개자식들 때문에 민족적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입니까”라며 흥분하자 만해가 웃으며 “벽초, 그런 말 하지 마소.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있다면 오히려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요.”라며 사회인사의 창씨개명을 비판했다. 또 만해는 만당의 일원이자 애제자였던 몽정 이용조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자 회식자리에서 “세상이 다 변해도 이 맥주맛과 몽정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몽정마저 강천으로 변했으니 이제 믿을 것은 이 맥주 맛뿐이요”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당시 다솔사 주지를 맡으면서도 일제시대 관보에조차 조선식 이름으로 기록돼 있는 효당 최범술 스님도 일제의 창씨 강요에 “나는 이미 출가해 불제자가 될 때부터 속성을 버리고 석(釋)씨로 바꾸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피했다고 전한다.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오늘날 관점으로만 창씨개명을 했다고 무작정 비난하거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것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오히려 그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자존과 양심을 지키려 애썼던 애국지사들의 고결한 뜻이 더욱 선양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일제하 불교계 창씨개명 유형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꾼 경우

법명대표직책 창씨 
강대련 수원 Y사찰 주지이하라 가오루(渭原螢)
박영희해남 D사찰 주지아카다 겐유(赫田元雄)
변설호 합천 H사찰 주지호시시다 에이지(星下榮次)
강성인서울 B사찰 주지하나다 요시기치(花田芳吉)
김경림 경주 G사찰 주지후로하라 빈기치(吉原敏吉)
박찬범 함주 G사찰 주지시카노 가이덴(鹿野階傳)
신윤영 남양주 B사찰 주지히라노 모도다(平野源田)
황벽응 금산 M사찰 주지아리타 순탄(有田賰澤)
허영호 조계종 종정 사서 도쿠미쓰 쓰바사(德光翼)
곽기종 문경 G사찰 주지니시하라 유이치(西原祐一)
이석두 영천 E사찰 주지이와모도 분진(岩本文璡)

*일본식과 한국식 이름을 합한 경우

법명대표직책 창씨 
박원찬경남3본산종무협회 회장 아라이 엔산(新井圓讚)
임석진순천 S사찰 주지 하야시 겐기치(林原吉)
이종욱조계종 종무총장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
손계조 수원 Y사찰 주지 마쓰다 게이조(松田啓照)
최상문경주 G사찰 주지 마루야마 쇼분(丸山翔文)
박윤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후쿠다 인신(福田允進)
윤상범 대구 D사찰 주지 이토 아이노리(伊東相範)

*형식적으로 바꾼 경우

법명대표직책 창씨 
장석상보은 B사찰 주지 우에이키 세키(上生石霜)
김청암고성 Y사찰 주지 가네가와 세이안(金川靑庵)
정창윤평양 Y사찰 주지 오야마 마사요시(大山昌允)
김정섭 강화 J사찰 주지 가네시로 마사사와(金城正澤)
박대륜고성 Y사찰 주지 샤쿠무네 다이린(釋宗大輪)
김경주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
김동화  혜화전문학교 교수 가네가와 도카(金河東華)
장도환 하동 S사찰 주지 하리모도 도칸(長本道煥)
김태흡 불교시보 발행인 가네야마 다이지(金山太洽)
권상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안도우 소로(安東相老)
김낙순 문경 D사찰 주지 가네다 라쿠준(金田洛淳)
김법룡 영변 B사찰 주지 가네이 호류(金井法龍)
김한송 영변 S사찰 주지 가네야마 간쇼(金山漢松)

*창씨개명 거부한 주지 스님들(일제하 관보 참조)

연도인가형태 사찰명 성명 
1940.11.21 취직인가 고성 보광사(普光寺)박거달(朴巨達)
1941.10.2취직인가여수 은적암(隱寂庵)원동석(元東碩)
1941.5.22 취직인가창원 성흥사(聖興寺)손칠성(孫七星)
1941.9.25 취직인가 칠곡 금곡사(金谷寺)김도인(金道仁) 
1941.11.14취직인가 영주 초암(草庵)김상호(金祥鎬)
1941.10.21 취직인가 하동 쌍계사(雙溪寺)박근섭(朴根燮)
1942.1.14재임취직인가 양주 내원암(內院庵)이해산(李海山)
1942.4.13 취직인가 정읍 영은암(靈隱庵)정봉모(鄭奉謨)
1942.7.27 취직인가 달성 운흥사(雲興寺)박덕문(朴德文)
1942.6.16 취직인가  천안 성불사(成佛寺)김광호(金光虎)
1942.8.21 취직인가  예산 향천사(香泉寺)이장호(李章鎬)
1943.1.12 재임취직인가 안변 성도암(成道庵)이길손(李吉孫)
1943.6.29 재임취직인가 경성부 미타사(彌陀寺)윤유겸(尹有謙) 
1943.3.29재임취직인가 통천 은적사(隱跡寺)홍용순(洪龍淳)
1943.9.14 재임취직인가사천 다솔사(多率寺)최범술(崔凡述)
1943.8.26 취직인가  창녕 도성암(道成庵)최선의(崔善意)
1944.1.13 취직인가  예산 수덕사(修德寺)황법운(黃法雲)
1944.4.24 재임취직인가 광주군 장경사(長慶寺)고명덕(高明悳)
1944.4.15 취직인가  옥구군 불국사(佛國寺)강오남(姜五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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