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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대각국사 의천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틀은 깰 때 넓어지니 敎·觀 어디에도 안주 말게

부와 명예와 권력. 이는 얻기도 쉽지 않지만 가진 것을 과감히 버리기란 더더욱 어렵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011) 스님의 위대한 점도 여기에 있다. 왕자라는 선망의 자리를 뒤로 하고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는 47세로 입적하는 그날까지 오직 구법(求法)과 전등(傳燈)의 원력으로 수행과 학문의 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의천 스님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다. 부왕 문종은 어느 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출가해 복전의 이익을 짓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출가의 뜻을 밝혔고 왕은 기꺼이 출가를 허락했다. 그 때가 1065년, 그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당시 왕사였던 난원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은 스님은 타고난 총명함과 끈기로 무서울 정도로 학문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20세가 되기도 전에 스님은 교장(敎藏)을 수집하겠다고 발원했을 정도로 불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학문에도 깊은 안목을 갖추었다.

그러나 ‘대붕(大鵬)’ 의천 스님에게 고려는 너무 좁았다. 스님이 31세 되던 해 임금의 만류를 뒤로 하고 몇몇 제자들과 함께 송나라를 향한 구법의 길에 올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곳에서 스님은 마치 선재동자처럼 화엄종, 천태종, 선종, 법상종, 율종에 소속된 고승 50여 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묻거나 교류함으로써 국제적인 안목을 넓혀나갔다.

어머니 인예태후의 간청에 못 이겨 14개월 만에 고려로 돌아온 스님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해 즉각 교장의 간행을 착수했고 몇 해 뒤에는 국청사 건립을 통해 천태종을 개창해 본격적인 후학양성에 나섰다. 하지만 스님의 몸은 스님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지나친 과로와 오랜 독서로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돼 갔다. 그럼에도 스님은 입적하는 순간까지 수많은 불교전적을 간행과 강의를 통해 교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통에 대한 해박함으로 새로운 천년을 틀을 세우고자 했던 대각 국사 의천 스님, 그를 만났다.

▷스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전혀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작두날에 선 무당이 떠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마치 칼날 위를 걷듯 평생을 팽팽한 긴장감과 고도의 집중력으로 살아가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참 불경스럽죠?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평생 동분서주 하며 마라톤 선수처럼 쉴 틈 없이 달려갔던 인생이었으니까.”

▷그런데 스님, 스님께서는 열한 살에 ‘자발적으로’ 출가했다고 전해지는데 약간 미화된 게 아닐까요? 요즘 식으로 보면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데….

“소를 물가로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먹일 수는 없지. 당시 내가 앎에 목말라 하는 사슴이었다면 절은 옹달샘이었다네.”

▷하기야 19세에 역대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수집하겠다고 발원할 정도의 안목을 갖추셨다니 참으로 치열하게 공부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스님, 그런데 교장(敎藏)을 모으겠다고 원을 세우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경전을 갖추었더라도 그것을 연구한 해설서들이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선지식들이 경율론을 연구하고 주석을 달았네.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그 성과를 넘어서는 것은 극히 힘들지 않겠나. 그렇기에 좋은 해설서들을 많이 유통해 읽혀지도록 한다는 그 자체가 불교수준을 한층 높이는 일인 게지. 그러나 당시 고려 불교계는 근본은 돌아보지 않고 곁가지에 매달려 억설만 분분했지. 학문이 발전하지 않으면 수행과 신행도 그 자리에서 맴 돌뿐이네. 그러다 결국 불법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 내가 어찌 그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원을 세우지 않을 수 있었겠나.”

▷요즘처럼 책을 많이 발행하는 것도 아니고 교통과 통신수단도 좋지 않은 여건에서 그 일이 참으로 어려웠겠습니다.

“새삼 말해 무엇하겠나. 내가 송나라로 건너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고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도 20여년에 걸쳐 문헌들을 모았네. 일일이 발품을 팔지 않고서는 책 한 권 얻기 힘든 때가 많았지. 그 일이 어찌 수월했을 터이며 아무리 나라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나.”

▷다른 얘기지만 당시 불교계에서는 스님을 부러워하는 분들이 많았겠습니다. 스님이 왕자이셨기에 받았던 특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요. 13세에 승통, 30세에 2800칸의 건물에 1000명이 상주하는 절의 주지, 천태종 창건, 송나라 불교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도 사실 스님이 왕자였으니까 가능했을 테니까요.

“엄청난 특혜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일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네.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네. 내가 만약 왕자가 아니라 평민이었다 하더라도 그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네.”

▷하기야 부귀와 영화를 버리기란 쉽지 않고 설령 그것을 버렸다하더라도 진정한 구도자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왜 그토록 균여 대사를 비판하셨나요. 그처럼 훌륭한 스님도 드문데 말입니다.

“10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 아픈 일일세. 신라는 물론 역대 중국의 수많은 문헌을 공부한 내가 균여 대사의 업적을 왜 모르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더군다나 스님의 은사께서도 균여 스님 계통의 스님 아니십니까?

“대사의 긍정적인 면이 컸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부작용도 없지 않았네. 대사께서는 불교를 ‘해동’이라는 틀에 가두었고 실제 어떻게 깨달음을 이뤄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다시피 했네. 앎은 틀을 깰 때 넓어지네.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지녀야 하고 학문적인 엄격함이 뒤따라야 하네. 대사께서는 그 점이 부족하셨고 그로 인해 후학들은 자신의 틀 속에 안주하려고만 했지. 내가 비판한 것은 균여 스님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처절한 다짐이자 비판이었다네.”

▷그렇군요. 하지만 그토록 칭찬에 인색했던 스님께서 원효대사를 ‘보살’로 칭하며 천태지자나 현수법장대사보다도 훨씬 높이 평가하고 심지어 용수와 마명만이 원효와 짝할 수 있다고까지 강조했습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원효께서는 방대한 교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온갖 불법을 회통시켰고 그 논리에 한 치의 모순과 어긋남도 없었네. 또 그런 와중에도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불법을 진작시킨 보살의 화현이셨으니 어찌 그 분을 내 삶의 모델로 삼지 않을 수 있었겠나.”

▷스님께서는 화엄을 늘 중심에 두었음에도 천태종을 새롭게 창종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천태종은 교학과 수행을 고루 갖추고 있네. 제관 스님을 비롯해서 천태종 계열의 탁월한 스님들이 여러 분 계셨지만 그 법맥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점이 너무 안타까웠네. 그렇기에 송나라에 가서도 일부러 종간 스님 등 천태종 스님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고, 천태대사 앞에서 고려에 그 가르침이 널리 펴질 수 있도록 서원했다네. 사실 고려에 천태종이 불처럼 일어서면 고려불교의 기본과제였던 선교 대립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지.”

▷그럼 스님께서 교관병수(敎觀幷修)를 그토록 강조했던 것도 고려불교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의도적인 생각에서였겠군요.

“법에는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말이나 형상을 떠난 것도 아니지. 만약 말이나 형상을 떠나면 의혹에 빠지고 말이나 형상에 집착하면 진실을 모르게 된다네. 교학을 하는 이들은 흔히 안을 버리고 밖을 구하며 참선하는 이들은 마음만을 밝히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다 치우친 것으로 중도가 아니라네.”

▷참 의외라고 생각이 되는데 스님께서는 화폐를 주조해 사용하자는 주전론을 주장하셨고 또 실제 스님의 영향으로 화폐가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를 형 숙종을 돕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로도 해석하던데요.

“쌀이나 베 대신 돈을 이용하면 운반과 교환이 편리하고 수취와 교환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도 줄일 수 있지. 또 녹미(祿米)의 독촉으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흉년에 대한 대비책도 세울 수 있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화폐가 유통되기를 바라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네 목숨이 줄어드는 물속의 고기와 같이 경각에 달렸거늘 무슨 즐거움을 찾겠는가? 촌음을 두려워하며 방일하지 말게. 도를 넓히고 밝히는 일은 나에게 달려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정진하게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의천 스님 어록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좋은 시절도 만나기 어렵다. 경에 이르기를 ‘젊음이 머무르지 않음이 달리는 말과 같고, 사람의 목숨 무상하기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아서 비록 오늘은 살아 있어도 내일은 보장하기 어렵다’고 했다. 여러분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는가?”
 (『원종문류』)

“어쩌다 머리털 이다지도 희었는가. 학업의 수고로움 쌓이고 또 쌓인 탓이지.” (『대각국사문집』)

“제가 원하는 것은 바른 도의 중흥이오나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바라옵건데,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遺敎)에 부흥토록 하시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대각국사문집』)


찬탄과 공경

“이 세상 그 누가 만리의 높은 파도 타고, 불법 위해 몸 잊고 선재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에서는 참으로 희유한 일, 마치 우담발화가 불 속에서 핀 것 같네.”
 (송나라 종본 스님)

“출가하여서는 도가 쇠하고 학문이 피폐한 때였지만 (대각국사는) 홀로 그런 세태를 등지고 옛 성현을 따라서 그들의 뜻을 조술코자 했다.” (고려 김부식)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되 천년 이후를 생각하는 학자적 자세,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엄격한 비판과 정밀한 교정, 전등을 위한 지속적인 강학(講學) 등의 진리 탐구 자세는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순수한 구도심과 불타는 지식욕, 그리고 사회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완벽을 추구하는 끝없는 의욕이 조화를 이룬 성격을 가진 그는 짧은 인생에 걸쳐 쉼 없는 활약으로 고려 불교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박노자·노르웨이 교수)


참고자료
『대각국사문집』, 김상현 「의천」·「의천의 연학과 학술사적 위상」, 최병헌 「의천과 송의 천태학」·「의천이 균여를 비판한 이유」, 남동신 「의천의 실천수행적 화엄사상」, 박노자 「의천의 한국불교사 의식」, 박상국 「의천의 교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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