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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청평거사 이자현

“집착 내려놓지 못하면 어디를 가든 세간이라오”

청평거사 이자현(淸平居士 李資玄, 1061~1125)은 부설거사, 추사 김정희 등과 더불어 한국불교사의 대표적인 거사로 꼽힌다. 청평은 날 때부터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할아버지 이자연은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였고, 아버지 이의 또한 재상에 오른 고위 관직자였다. 게다가 3명의 고모는 왕비, 왕은 고모부였으며, 삼촌 소현 스님도 불교계 최고 실세인 왕사를 맡고 있었다.

영민했던 청평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23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젊은 나이에 ‘대락서승(大樂署丞)’이라는 고위관직에 오른 그는 사촌 이자겸과 함께 인주 이씨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인재로 촉망받았다.

하지만 갑작스런 아내와의 사별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아내가 시름시름 앓더니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27살의 젊은 청평에게 더 이상 세간의 삶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관심은 출세간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권력 쟁취를 위해 음모가 끊이질 않는 세계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이를 계도해야할 불교계마저 사분오열돼 다투는 모습은 뒤늦게나마 출가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어놓았다.

청평은 봇짐 하나 짊어진 채 유랑에 나섰다. “이제 가면 다시는 도성(개성)을 밟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종일 걷다 마시는 샘물 한 모금은 어떤 명주보다 맛이 좋았고, 허기에 지쳐 먹는 거친 밥 한 끼는 산해진미보다 나았다. 그렇게 전국을 유람하던 중 그의 발길이 이른 곳은 춘천 경운산이었다. 이곳은 부친이 보현원이라는 암자를 지어 놓은 곳이기도 했다. 그는 산을 청평산(淸平山)이라 부르고, 암자도 문수원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문수원에 머물며 교학을 연구하고 참선수행에 매진했다. 왕의 부름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도성을 밟지 않겠다”는 자신의 뜻을 꺾지는 않았다. 지인들과 서신으로 교류하기도 하고 인연 따라 사람들에게 불교경전도 강의했다. 37년간 청평산에서 세월을 보내며 65살로 입적한 청평은 세속을 초탈한 진흙 속의 연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이면 껌뻑 죽는 게 다반사인데 거사님께서는 보장된 권력의 자리를 뒤로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내의 죽음 때문인가요?
“때가되면 누구나 다 죽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대부분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남의 일로만 치부해버리오. 그러다보니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게 아니겠소. 아내의 죽음은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절망과 또 다른 가능성을 함께 주었소.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고립시키고 결심했던 거요.”

▷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고 했는데 거사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놨기에 그토록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내 수행정도야 내세울 게 있겠소. 다만 욕망의 지옥을 통과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욕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오. 집착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만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얘기지요.”

▷출가를 하지 않고 거사로 끝까지 남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출가했다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여러 직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세속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요. 욕망과 집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어디를 가든 세간 아니겠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했다오.”

▷당시 거사님과 교유했던 분들이 많았다는데 어떤 분들이셨나요?
“혜소국사와 탄연 스님을 비롯해 이오, 윤언이, 곽여, 권적, 은원충 같은 분들이었소. 그중 나와 유독 가까웠던 분 중에 금강거사 윤언이라는 분이 있었소. 비록 그는 나보다 연배가 30년가량 적었지만 참으로 좋은 도반이었지요. 훗날 그 거사는 영평에 금강재(金剛齋)를 짓고 참선하며 지냈는데 간혹 성안에 들어갈 때면 항상 누런 소를 타고 다니곤 했던 기인이기도 했다오.”

▷거사님의 산중생활이 어땠는지요.
“훗날 뇌천(김부식)이 기록했듯 채소와 누비옷으로 지내며 청정한 일상을 즐거움으로 삼았소. 간혹 선(禪)을 좋아하는 이가 오면 밤새 토론하기도 했지요. 허나 산중에서 가장 큰 벗은 고독 아니겠소. 홀로 경전과 선어록에 심취하고는 했지요. 어느 날 설봉 스님 어록을 읽다가 ‘천지 하나하나가 눈(眼)인데 너는 어느 곳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느냐’라는 대목에 크게 느낀 바가 있었소. 그 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소.”

▷거사님께서는 어록보다도 ‘능엄경’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대장경과 여러 서적을 두루 읽었는데 ‘능엄경’이 심종(心宗)에 가장 부합하는 경전이었소. 깨달음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방법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돼 있기 때문이었지요.”

▷요즘에는 ‘능엄경’이 전통강원에서 꼭 읽어야 할 경전으로 정해져 있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능엄경’을 강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쩌면 당시 거사님께서 강조하신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사님께서 청평산에 지은 여러 암자도 ‘능엄경’과 관련된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소. 내가 10여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중에 견성(見性)과 문성(聞性)이라는 곳이 있오. 견성은 성품을 본다는 뜻으로 능엄수행의 이론적 기반을 집약한 표현이고, 문성은 성품을 듣는다는 뜻으로 능엄수행의 실천방법을 집약한 것이오.”

▷선과 ‘능엄경’ 외에 유식사상에는 큰 관심이 없으셨나요. 거사님 친척들 중 출가하신 분이 모두 법상종 계열이고 집안의 후원도 대단했던 것 같은데요.
“유식은 마음의 구조를 심층적으로 다룬 불교심리와 수행의 꽃이오. 어찌 수행하는 이가 이를 외면할 수 있겠소. 하지만 그 무렵 법상종을 비롯한 교단은 지나치게 계파간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었소. 법이 중심에 서지 않은 논쟁과 다툼은 중생을 저버리고 불법을 망치는 길이오.”

▷그렇더라도 예종께서 한 번 입궐하라고 그토록 요청했는데도 응하지 않은 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요. 오죽했으면 임금께서 ‘그리워 보고 싶어 애달픈 이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하고 쌓이건만 높은 뜻 빼앗지 못하매 내 맘 어이하리오’란 시까지 남기셨겠습니까?
“내가 결심했더라도 임금이 부르면 갈 수 있소. 그러나 한 번 다짐을 어기면 다음번에는 더 쉽게 무너지고 결국 밑바닥까지 무너지게 되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소. ‘한번만’이라는 나태한 생각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소.”

▷결국엔 임금께서 도성을 나와 거사님을 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임금께서는 그토록 거사님을 뵈려고 했던 건가요?
“답답하셨겠지요. 외척 등 임금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권다툼, 얽히고설킨 세상살이에 불교계마저 싸움판으로 전락했으니 어디서 위로를 받으실 수 있었겠소. 임금의 말씀에 귀 기울였을 뿐이지요. 다만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욕심을 적게 하시라’는 당부와 함께 맛 좋은 차를 건네 드렸지요. 스스로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집착과 기대인 까닭이라오.”

▷거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사회가 잘못됐다면 뛰어들어 고치려 해야 하지 않습니까. 권력자들이 부패하고 승단이 타락해도 홀로 고고하게 유유자적하는 것이 어찌 바람직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서양의 니체라는 철학자가 ‘악마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악마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지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경계함 없이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만 민감한 사람들이 아주 많지 않소. 교화는 반드시 대중 속에서만 가능하고 산중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오. 스스로 청정해지려 노력하고 자신이 터득한 지혜를 나누는 것 또한 참으로 가치 있는 일 아니겠소. 그것이 곧 세상과 후세를 향한 내 고요한 외침이자 믿음이었소.”

▷거사님께서 살던 세상과 지금은 많이 변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요즘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내 삶이 평화로웠다면 그것은 출신이나 재력 때문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요. 내 사촌 이자겸은 권력의 끝을 좇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소. 그러나 나는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헛된 욕망과 권력이 아닌 내려놓는 삶을 선택했소. 조건이나 누군가를 탓하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숙고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이은상 「청평거사 이자현」, 최병헌 「고려중기 이자현의 선과 거사불교의 성격」, 조용헌 「이자현의 능엄선 연구」, 이경수 「은둔의 전통과 청평사 한시」, 서경수 「고려의 거사불교」, 김호연 「문수원 정원과 이자현의 사상」, 윤국병 「문수원 정원과 시대적 배경」, 강순형 「문수원터 청평사」, 법현 스님 「능엄선의 도입자 이자현 거사 」 등

이자현 어록

“집은 푸른 산봉우리에 있는데/ 전부터 있어온 보배로운 거문고./ 한 곡조 타 봄직 하지만 다만 지음(知音)이 적구나.(家住碧山岑 從來有寶琴 不妨彈一曲 祗是小知音)” (『파한집』 중)

“내가 대장경을 다 읽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으나 『수능엄경』은 심종(心宗)에 부합되는 것이며, 중요한 방법을 발명한 것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것을 읽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탄할 만한 일이다.” (「청평산문수원기」)

“신이 처음 도성문을 나설 때에 다시는 서울(개성)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가 있었으므로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합니다.” (『파한집』 중)

찬탄과 비판

“이자현으로 말미암아 선법이 해동에 널리 유포되어 혜조국사·대감국사가 모두 그 문하에 공부했다.” (고려 이인로)

“이자현은 승려라는 출가의 명분을 따지지 않은 채 능엄의 오도자요, 또 고려에 있어서 독립적인 선학(禪學)의 선구자이었으니 뒷날 보조의 선종도 실상 그로부터 흘러 내려온 것에 힘입음이 컸던 것이다.” (시조시인 이은상)

“사회구제의 사명감이 없었던 고려불교의 거사들은 결국 자기 구제조차 완성 못하고 청산유수를 벗하며 무역사(無歷史), 무사회(無社會)의 가상적 진공에서 일시적 자기위안과 자기만족에 도취함을 자기구제로 착각하고 일생을 살았다.”
 (전 동국대 교수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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