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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모이면 하나 흩어지면 여럿

기자명 법보신문

‘크다·작다’ ‘길다·짧다’는 상대적 개념
얽매임 없이 모으고 흩어놓는 지혜 배워야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 시간의 흐름은 길다거나 짧다는 말로 거리를 재려 하고, 공간은 크다 작다는 말로 부피를 따지려 한다. 그러나 이 단위의 측량적 언어는 항상 불확실한 것이다. 길다 크다 함이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그 말의 정확도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영겁이라거나 3세라 하면 대단히 긴 시간으로 인식되지만, 영겁에다 3세를 견주어 놓으면 3세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대천세계니 수미산이니 하면 매우 큰 부피이지만, 대천세계에다 수미산을 견주면 매우 작은 부피가 된다.

이렇듯 모든 존재의 단위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사물에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하는 『반야심경』의 진리를 받들어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보조국사의 ‘원돈성불론’에 있는 6자3대법(六字三對法)을 좀 생각해 보기로 한다. 글자 그대로 6 글자를 3가지로 대칭지어 사물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총별(摠別), 동이(同異), 성괴(成壞)의 여섯 글자를 세 묶음의 맞대응으로 사물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실례를 든 한 예문을 보자.

“3세니 영겁이니 해서 차별지우는 것을 별상(別相:차별지운 모습)이라 하고, 지혜로이 널리 보아 모든 것이 한 찰나에 있다 함이 총상(摠相:하나로 갈무리한 모습)이라 한다. 자신의 업에 따라 길다 짧다 하는 것을 이상(異相:달라진 모습)이고, 정이 사라지고 알음알이도 없어져 시간의 장단이 없는 것이 동상(同相:같은 모습)이다. 지혜로워 의지하거나 머무름이 없음이 괴상(壞相:무너뜨려 버린 모습)이고, 근기나 법에 따라 사물을 보면 성상(成相:이루어진 모습)이라 한다.”

모든 사물 존재의 실상이 이 여섯 글자의 세 묶음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잔인하리만큼 부수어 갈라놓을 수도 있고, 대자대비하리 만큼 끌어안아 하나로 볼 수도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사물인식을 나는 가끔 시인의 안목에서 느끼기도 한다. 그 실례를 서정주 시인의 널리 알려진 ‘국화 옆에서’에서를 잠시 음미해 보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중략…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내리고/ 내게도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의 각각의 소재들, ‘국화 소쩍새 천둥 무서리 나’는 그 나름으로 개체를 이룬 성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화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모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체의 성상이 여지없이 파괴된다. 곧 괴상이 되어야 한다. 국화에서 소쩍새의 울음을 듣고, 천둥소리를 듣고, 잠을 못 이루는 나를 보았으니 이는 각각의 다른 상(별상, 이상)을 하나의 상(동상, 총상)으로 끌어안는 시인의 포부가 보인다. 가을의 꽃을 읊으면서 봄의 소쩍새를 떠올리니 자연히 시간의 괴리가 생긴다. 이것은 바로 삼세니 영겁이니 하는 시간의 거리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화야 가을에 피었지만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요인 인자는 소쩍새 우는 봄날에 이미 싹 텄던 것이다. 봄과 가을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다. 시인의 안목에는 역시 혜안적 투시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뜰 앞에 국화의 누런 잎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이미 고인이 된 스승의 시가 연상되어 흩어진 사물들의 모습을 끌어안아 하나로 갈무리하는 지혜를 배워 보았다. 보조국사의 이론과 서정주 시인의 시가 한 공간에서 논의된 것도 삼세 영겁의 구별이 없는 총상이 아닌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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