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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묘청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죽은 물고기만 흘러갈 뿐 대세라고 따르지 말라”

착취-굶주림 없고
당당한 자주국가
만들고 싶었다

묘청(妙淸, ?~1135) 스님은 역적으로 몰려 입적했기에 그의 출신과 성장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서경(평양)이 고향으로 법명이 정심(淨心)이라는 것과 풍수도참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로만 알려져 있다.

스님이 정계에 진출한 것은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의 소개 때문이다. 정지상은 과거에 합격해 중앙에서 벼슬을 살던 인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다. 임금의 깊은 신임을 받던 정지상이 묘청 스님을 ‘성인’이라고 일컬었고, 임금 또한 스님을 만난 뒤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채고 스님께 정사의 조언을 구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

묘청 스님은 문벌귀족의 수탈이 극에 이르고 더욱이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마저 불타버린 상황에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는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고, 우리도 당당하게 임금을 황제로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인종 임금은 스님의 요청에 받아들여 직접 서경에 가 지세를 살펴보고 궁궐을 짓도록 했다. 스님은 개경에 궁성을 짓는 한편 팔성당을 설치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개경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경천도는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온갖 유언비어와 술책으로 묘청 스님의 천도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다. 이렇듯 어렵게 천도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불운하게도 서경에 잇따라 지진이 일어나고 궁궐에 벼락까지 내리쳤다.

이를 계기로 개경의 문벌귀족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묘청 스님의 말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요망한 말로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목을 베야 한다고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다. 인종도 결국 이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스님의 서경천도는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스님은 독자적으로 서경에 대위(大爲)라는 나라이름을 짓고, 인종이 당당히 황제로서 서경으로 오기를 요청하며 끝까지 항쟁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으나 얼마 후 자신의 부하 조광에게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일천년래의 일대 사건’이라는 ‘묘청의 난’은 역적이라는 레테르를 붙인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갔다.

 

▷반갑습니다, 스님. 스님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가 유일한데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스님을 요승(妖僧)으로 보는 이들도 많고 반대로 민족자주의 화신으로도 평가됩니다. 어떤 게 맞나요?

“혁명이 실패했으니 역적이고 이를 기록한 조선초의 김종서, 정인지 등이 유학자들인데 승려인 나에 대해 좋게 얘기했겠는가. 현재를 통제하려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고 하지 않나.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역사는 근본적으로 정치사라네.”

▷사실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스님은 말 그대로 스님인데 아무리 풍수에 정통하셨다고 하더라도 불교와 관련한 행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심지어 정지상 같은 분은 성인이라 일컬었고 당시 많은 이들이 존경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요.

“당시 스님들이 풍수를 공부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네. 훗날 태고보우 스님이나 무학대사까지도 그러했으니까. 그럼에도 집권층은 내가 화엄이나 밀교 등을 공부한 사실은 외면한 채 유독 풍수만을 강조한 건 내가 승려로서 차지하는 위치를 폄하하여 한낱 잡술이나 부리는 주술사로 바라보고 싶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면 진실은 무엇인가요?

“임금은 외척으로 인해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귀족들은 백성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배를 채웠네. 『고려사』에도 당시 귀족들의 집에는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나가고 남의 토지를 강탈해 무수한 백성을 길거리로 내몰았다고 기록돼 있지 않나. 진실이 있다면 피비린내 나는 정권쟁탈, 질병과 재난, 착취와 억압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참혹한 중생들의 삶이 있다는 거 아니겠나.”

▷그것이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을 펼친 이유인가요? 그리고 왜 하필 서경으로의 천도입니까?

“도읍을 바꿈으로써 권신들의 권력 기반을 없애자는 것이고, 나아가 사대외교를 통박하고 자주적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싶었지. 하지만 서경을 택한 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태조께서도 서경을 제2의 도읍으로 간주하셨고 많은 이들이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해 왔었네. 외침을 막기에 그곳이 가장 적합했을 뿐더러 고조선의 수도로 우리 민족의 발생지라는 이유도 있었다네.”

▷혹시 스님의 고향이 서경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요?

“출가자에게 고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머무는 곳이 고향일 따름이지. 앞서 얘기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귀족세력들로부터 벗어나 왕으로 당당히 서고자 했던 인종임금의 뜻을 받들고자 했던 것이지.”

▷그렇더라도 당시 거대한 송나라까지 무릎 꿇게 한 금나라가 한낱 고려의 서경천도로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 허황된 것 아닌가요?

“개인이건 나라건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과 주인의식일세. 자기 것을 굽히고 버리다보면 병들어 뿌리와 가지가 시든 나무처럼 왜소해지고 불완전해지는 것이라네. 식민지보다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이 깜부기 같은 열등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자의 얘기로 들립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꿈이 있어야 현실을 볼 수 있다네. 현실이란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관점을 가졌을 때 비로소 보인다는 거야. 그게 바로 이상이네.”

▷스님께서 서경에 대화궁을 지으면서 먼저 팔성당(八聖堂) 증축하셨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옛 고구려와 서경지역의 수호신과 주변의 명당 산신들을 불보살과 일체화시킴으로서 전통적이고 민중적인 신앙체계를 결집시키려고 했었지.”

▷하지만 궁궐을 짓는 도중 지진과 벼락이 내리쳤다고 들었습니다. 하늘이 정해준 땅에 궁궐을 짓는데 어찌 벼락이 떨어질 수 있을까요?

“내 복이 없고 임금의 복이 없고 우리 민족의 복이 없는 거겠지. 그러나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본다면 그 때는 천재지변의 시대였네. 『고려사』를 보면 예종과 인종 임금 때 기우제를 지낸 횟수가 무려 64회에 이르네. 다른 왕들 때 열 번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어떤 시절이었나 가히 짐작이 가지 않나. 특히 인종 임금 때에는 폭우 등 자연재해가 42차례나 된다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재해시기라 할 수 있지.”

▷어쨌든 스님의 뜻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쟁을 결심하신 건가요?

“그 항쟁은 중앙문벌귀족을 타파함으로써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고려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 아니며 민족의 분열, 분단국가 건설을 획책한 것은 아니네. 내가 건의해 임금께서 발표한 유신정령(維新政令)의 내용, 즉 지방수령의 부정을 고칠 것, 의복 및 수레제도의 간소화, 법이 정한 공물과 조세 외 수탈의 금지, 곡식을 강요해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짓이나 썩은 쌀을 백성에게 주지 말 것 등도 그러한 취지에서였고, 서경에서 항쟁을 시작한 뒤에도 서경에 인종임금을 옹립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것도 정권에의 야욕이 아니라 대의 때문이었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 등을 비롯해 내년 초에는 광개토왕의 일대기를 다룬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까지 선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는 감회가 색다를 것 같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영향이 크겠지.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드라마가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욕망을 부추기지 않나 싶네. 만주벌판과 중국까지도 우리 땅이었으면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꿈틀거리게 하는 거지. 또다른 제국주의의 형태라 할 수 있지. 내가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했던 것은 강대국에 당당히 맞서자는 것이었지 우리도 금나라처럼 침략자가 되자는 것은 아니었네.”

▷여러 가지 말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대세라고 무조건 따르지는 말게나. 죽은 물고기만 강물을 따라 헤엄친다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묘청 스님 어록

“신 등이 보건대 서경에 궁궐을 세우고 임어(臨御)하시면 가히 천하를 합병할 수 있고 금나라가 방물을 바치고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조공하게 될 것입니다.”(『고려사』)
“상감께서 대화궁을 지으시어 천도할 뜻을 가지셨거늘 어찌 신하들이 상감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한갓 향토심으로 천도를 반대하겠나이까. 인심은 두려움직한 것이며 대중의 분노는 막기 어려운 것이니 임금께서 만일 오신다면 병기는 당연히 거둘 것이외다.”(『고려사』)


찬탄과 비판

“서경전역은 낭불(郎佛)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년 이래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겠는가.”(신채호·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묘청과 같은) 진정한 반역아일수록 그에 의하여 시대의 병폐와 사회의 결함이 그대로 폭로되나니 그러므로 사상(史上)의 반역아를 가려다가 검토하면 오로지 그 시대와 사회를 알 수 있을 것이다.”(문일평·사학자)

“대내적으로는 가혹한 봉건착취의 조절과 대외적으로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나라의 부흥발전을 열렬히 주장했던 애국자이자 반사대주의자다.”(리용중·북한 사학자)

“서경천도론은 묘청이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한 권력추구의 정치성향이었다.”(진석우·사학자)

참고자료
문일평 「묘청」, 강만길 「묘청, 사대에의 모반」, 김상기 「묘청의 반란」, 강옥엽 「묘청난의 연구동향과 새로운 인식모색」, 강성원 「묘청의 재검토」, 송진환 「묘청의 풍수도참사상과 불교관에 대한 연구」, 여익구 「민중불교의 횃불」, 김성동 『뒤집어보는 한국불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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