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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남김없이 가다

기자명 법보신문

남김 없음의 無餘가 곧 열반
버리는 수행이 잘살기 수행

며칠 전에 추석 한가위 이야기를 했는데, 벌써 단풍잎을 감상한다 하고, 그 잎이 뜰에 덜어져 아침저녁으로 빗자루를 들게 한다. 이를 두고 늘 세월이 무상하다 하지만 사실은 무상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정상적 질서의 순환이다. 나무들은 이제 한 해의 마무리를 정상적 순환의 질서에 따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가지를 풍성하게 덮고 있던 잎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있다. 서리가 짙고 나아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잎은 남김 없이 근원의 땅으로 돌아가 다음해의 움트는 숨 고르기를 할 것이다. 이 남김 없음의 무여(無餘)가 바로 열반이다.

사람살이의 주기는 네 계절의 한 해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라는 긴 거리를 놓고 일생의 주기로 삼기에 항시 이 삶과 죽음을 중시하게 된다. 잘 살자 하는 ‘잘’의 개념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할 수도 없으면서, 우리는 이 ‘잘’을 향하여 알게 모르게 전진하고 있는 셈이다. 1·2년 전부터 ‘웰빙’이란 말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웰다잉’이란 말이 그 자리를 양보 받은 것 같다. 좀 여담이긴 하나, ‘잘살자’ ‘잘죽자’인 것 같은데 굳이 그런 낯선 용어를 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좀 비위에 거슬리기도 한다. 재래적으로 상용되는 말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양생술(養生術)’이라 하여 웰빙의 기술까지도 가지고 있었으며, 선서(善逝)라 하여 죽음의 길을 늘 착하게 닦으려 하지 않았나.

불교계에서 요즘 이 웰다잉을 선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웰다잉 특강을 개설했다 한다. 굳이 이런 이름의 특강이 있어야 하나 하는 뒤떨어진 생각을 가지게도 한다. 불가의 행사에 예수재(豫修齋)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글자 그대로 살아서 죽음을 미리 닦는 것이다. 죽음을 전제로 한 살아서의 선행이 바로 죽음을 미리 닦는 것이 아닌가. 삶과 죽음이란 결국 하나의 시공 속에 있는 것이니 삶이 죽음의 이쪽이라면 죽음은 삶의 저쪽이다. 그러니 이쪽이 잘 되면 저 쪽도 잘 되는 것은 해의 밝음을 받아 밤을 밝혀 주는 달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잘 살기가 바로 잘 죽음일 것이다.

한 해의 계절을 잘 살고 가는 나무들은 제 잎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잘 죽기의 웰다잉이다. 바로 이것이 선서이니 선서란 잘 버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산다라는 웰빙에 기준을 두고 보면 넉넉한 가짐이 잘 살기이지 버림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우리의 삶의 방법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하는 욕망의 충족이지 실망의 버림은 아니다. 그래서 죽음에다 기준을 둔 웰다잉의 강좌가 설정된 것 같기도 하다.

용어야 잘 살기이든 잘 죽기이든 지향점은 같은 것이니, 결국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이다. ‘잘’이라는 수식어를 ‘선(善)’으로 대치할 수 있다면 결국은 선행으로 손등과 손바닥을 아우르는 손을 삼을 수밖에 없다. 선행이란 행위는 상대적 남이 있어 이루어지는 것 같아 나에게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의식하는 행위 같기도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수양이지 상대의 존재 여부와는 무관하다. 남과는 무관한 나의 행위로 기준을 둘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항시 나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오늘도 뒷 동산을 산보하다 잎을 하나 둘 떨어뜨리는 나무를 보고 잘 가는 방법을 배웠다. 버리고 가는 수행이 바로 예수재를 올리는 심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무는 남김 없이 버리고 있다. 풍성했던 여름인 이쪽은 버리고 겨울 추위의 저쪽을 평안히 보내려는 지혜이다. 남김이 없음 이것이 바로 무여열반이 아닌가. 열반에 이르는 남김 없음이란 결국 육신과 육신을 유지했던 지혜까지도 남음이 없어야 한다. 아낌없이 버리는 수행이 바로 잘 살기의 수행이리니 가을철 낙엽 지는 소리에서 사자후의 법문을 되새기게 된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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