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3 격의 없이 주고 받다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승-유가 사심없는 사귐서
세계와 어울리는 지혜를 배워야

어떠한 사물을 살피든지 한 면만을 보다 보면 한 면은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범인들의 안목이다. 마치 양지쪽만 바라보다 보면 추위에 떨고 있는 음지를 잊는 것이나 같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보는 시각도 그렇다. 과거 조선조의 사회는 유교를 국시로 해서 불교의 학대가 심했다 하여 유가의 선비와 불가의 스님들은 마치 양지 음지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었던 사회로 치부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잘 들여다 보면 서로의 어울림이 돈독하여 동도자의 지기보다 더 가까운 사이도 많았다.

오늘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시인이요 고관의 벼슬을 지낸 이안눌(李安訥, 호 동악 東岳)이라는 분과 당시의 스님들이 격의 없는 어울림을 들여다보려 한다. 동악선생은 덕수 이 씨의 가문으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의 집안이다. 서울에서 살았던 곳이 지금은 남산 아래 필동의 한옥 마을 민속촌으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동국대학의 후문 쪽에 그가 시문을 즐기던 터의 바위에 ‘동악시단’이라 새겨져 전하기까지 하였는데, 대학에서 건물을 확장하게 되어 그 자리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동악선생의 문집인 『동악집』에는 시를 주고받은 스님의 숫자만 해도 족히 1백 명은 넘을 것으로 보이고, 스님으로는 운곡 충휘(雲谷 沖徽)의 문집인 『운곡집』에도 동악선생과 주고 받은 시가 여러 편 남아 있다.

운곡 스님이 절로 들어가다가 동악선생에게 시를 써 보냈다.

‘흰 물살에 배를 불러 나루 건너 / 푸른 산으로 말에 맡겨 돌아가다 / 바람 골짜기 꾀꼬리 울음의 저녁 / 꽃 이슬이 연꽃 옷을 적신다.(白水呼船渡 靑山信馬歸 谷風鶯語多 花露濕荷衣)’

걸음 닿는대로 가는 스님의 걸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여기에 화답하는 동악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다.

“호계에는 봄이 또 늦었는데 / 허전한 채로 늙은 중을 보내네 / 관리의 일 참으로 부끄러워 / 풍진 세속에 흰 옷 물들어(虎溪春又晩 空送老僧歸 吏役眞堪愧 風塵染素衣)”

관리로 묶여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호계는 중국 여산의 혜원(慧遠)법사와 당시의 문인인 도연명 육수정과 대화하다 넘지 않기로 한 이 호계를 넘었다 하여 유명해진 시내인데, 여기서는 덕유산에도 호계가 있어서 인용한 것이다. 속세와 청정계의 먼 거리를 상상으로 넘나드는 정신적 교감이 넘치는 시인들의 주고받음이다. 유생과 승려라는 신분적 거리가 전혀 없다.

이런 기록이 있다. ‘적석사의 묘정스님과 전등사의 지경스님, 정수사의 유암스님, 문수사의 천오스님이 일시에 찾아와 기쁨이 넘쳐 시를 지었는데, 남한산성의 의진, 진일, 희안 세 스님이 함께 와서 나를 보고 간제가 겨우 이틀이다’ 하면서 시를 짓는다.

“평생 괴벽한 성품으로 구름 숲을 사랑하여 / 이르는 곳마다 스님들 깊이 사귀다 / 어제는 세 스님이 겨우 지나가더니 / 오늘 새벽 네 스님이 또 찾아왔구나 / 흉년이라 아전들은 대접이 잦다 비웃고 / 밤이 짧은데 종놈들은 이야기 길다 짜증낸다 / 곧바로 몸도 석장 따라 가고 싶지만 / 가을 서리 머리 가득하고 조정의 인끈 부끄럽다.”

이것은 그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강화부의 청사가 절간으로 변한 인상을 가지게 한다. 세계화라는 큰 틀의 어울림을 하려거든 우리 옛 어른들의 사심 없는 사귐에서 배웠으면 좋겠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