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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의 사자후 터져 나온 그날의 장엄 아직도 성성

기자명 법보신문

효봉 스님 오도성지 ‘법기암’ 추정터를 가다

<사진설명>효봉 스님 오도성지 추정터에서 입정에 든 답사단. 매서운 겨울바람도 이 순간만은 구도의 열기에 숨을 죽였다.

통합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일명 ‘절구통 수좌(首座)’로 불렸던 효봉 스님의 오도지(悟道地)와 금강산 법기암 추정터가 대중에 첫 공개됐다.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과 현대아산은 12월 15~17일 금강산 신계사 산내암자 법기암 추정터에 대한 답사를 실시했다. 효봉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던 이곳은 경주 흥륜사 선원장 혜해 스님의 출가지로도 유명하다. 이번 답사에서는 효봉 스님이 신고(辛苦)의 고통을 이겨내며 수행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토굴터도 함께 공개됐다. 한편 문화사업단과 현대아산은 법기암과 효봉 스님 오도지를 금강산 성지순례 코스로 개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녹포란)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다)
次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청명한 햇살과 싱그러운 풀 향이 천지를 진동하던 초가을 비 개인 어느 날 아침, 무문관의 벽을 박차고 나온 한 수좌의 입에서 게송(偈頌)이 터져 나왔다. 삭발염의 이후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무(無)’자 화두를 확연히 깨친 개안(開眼)의 사자후였다. 햇빛을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은 마치 겨우내 방안에서 자란 무순처럼 창백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제 멋대로 자라 덥수룩했으며 몸은 바싹 야위어 도저히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섬광처럼 빛났고, 혜성처럼 형형했다.

‘절구통 수좌’  1년 8개월 정진

<사진설명>효봉 스님의 오도지로 추정되는 곳.

그는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 ‘절구통 수좌’라고 불렸던 효봉(曉峰) 스님이었다. 1930년 봄 ‘일대사의 인연을 해결하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지 않겠다’는 사생결단의 결심으로 법기암 뒤 토굴에서 용맹정진에 돌입한지 꼭 1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2006년 12월, 햇수로 8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답사단 앞에 모습을 드러낸 법기암터는 여전히 그날의 장엄한 기운을 생생히 담고 있었다. 비록 아름다운 산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이끼가 눌러 붙은 축대와 형태만 갖춘 우물터, 부서진 채 간간히 발견되는 기와 파편은 추정지임에도 한 눈에 이곳이 법기암터임을 짐작케 했다.

와편-축대만이 옛소식 전해

신계사에서 1.8km 떨어진 법기암터는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관광이 허가된 지역 외에는 사진 촬영마저 금지된 이곳을 북측이 선뜻 허락한 것은 효봉 스님의 법력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리라. 외금강 깊숙이 법기암으로 향하는 답사단의 발걸음은 그래서 더욱 더 환의로 가득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일명 미인송(美人松)숲을 걷기를 20여분, 세존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자 ‘법기암터’에 거의 도달했음을 알리는 작은 푯말이 나타났다. 무릎 높이의 대나무숲 속으로 5분여를 더 들어가자 눈앞에 푸른 이끼로 뒤덮인 축대와 아담한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효봉 스님의 오도지 법기암터다.

<사진설명>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법기암 터에는 푸른 이끼만이 가득하다.

법기암터 곳곳에는 이곳이 한 때 절터였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흩어진 채 남에서 온 참배객을 맞았다. 법당터 옆 큰 바위에는 대응, 대섭, 초월 이라는 스님들의 법명이 아직도 선명히 새겨져 있었고, 맑은 샘물이 퐁퐁 솟는 우물 주변에는 혜월명(慧月明), 이발심행(李發心行) 등 깊은 신심을 발했을 시주자의 법명이 석재에 적힌 채 널부러져 있었다. 기와와 토기편도 이곳이 절터임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었다. 일행은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감동에 한참동안 말을 잃어버렸다.

주변의 정적이 어색함으로 옮겨갈 무렵, 거친 숨을 몰아쉬며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혜해 스님이 도착했다. 암자터를 조용히 둘러 본 스님의 얼굴에는 숙연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윽고 스님은 삼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불효 상좌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법기암에서 스승의 연을 맺은 대원 스님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답사단은 세존봉을 바라보며 간단한 의식을 봉행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답사단은 법기암 뒤편 효봉 스님 오도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 작은 개울을 건너 도착한 곳은 1평 남짓한 평평한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낙엽들을 걷어내자 구들의 흔적이 선명히 나타났다. 이곳이 효봉 스님이 장좌불와(長座不臥)와 묵언정진(默言精進)을 하며 생사를 건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성지 중 성지. 비록 지금은 추정터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효봉 스님 오도지임이 학술적으로 증명된다면 이날의 방문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성지 순례 코스 개발키로

<사진설명>낙엽과 흙더미를 걷어 내자 효봉 스님 토굴의 구들 흔적이 나타났다.

자연스레 답사단은 효봉 스님 오도지에 모여 앉았다. 효봉문도회를 대표해 답사에 동참한 현봉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답사단은 미륵정진에 이어 잠시 입정에 들었다. 눈 쌓인 개골산(皆骨山)을 휘돌아 가슴이 아리도록 몰아치던 차가운 겨울바람도 이 순간만은 스님들의 구도 열기에 힘을 발하지 못했다.

“지금의 효봉문도회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법기암 스님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기암 스님들의 정성이 있었기에 효봉 스님이 오로지 화두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효봉문도회를 대신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봉 스님의 지극한 헌사에 법기암 문도를 대표하는 혜해 스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때마침 계곡 밑 얼음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줄기가 금강산 골골에 힘차게 구비쳤다. 현장을 함께 답사한 문화사업단과 현대아산 관계자는 법기암터와 효봉 스님 오도지를 성지순례 코스로 개발하기로 뜻을 모았다. 북녘 땅에 외롭게 효봉 스님의 흔적을 전하던 이곳이 불자들의 아름다운 귀의처가 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금강산=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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