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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백운 경한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꽃 피고 새 우는 소리가 깨달음 이루는 해탈문

경전의 문자도
마음 그 자체도 버린
무심의 경지가 禪

찬란한 ‘불일(佛日)’의 시대를 지나 불교가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르던 고려말. 스님들은 귀족화되고 사찰은 고리대금업 등으로 기업화되던 진흙탕 같던 말법시대에도 연꽃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으니 백운, 태고, 나옹 스님 등이 바로 그 분들이다.

이중 태고보우 스님은 임제의 법맥을 잇는 한국 간화선의 적자로, 나옹혜근 스님은 생불로 추앙되며 오랜 세월 명망을 받아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운 스님은 치열한 구도와 큰 깨침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곧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던 스님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우리 곁에 온 것은 1970년대 초. 스님의 저술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후 스님은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거듭나며 수많은 학술세미나와 문화행사들에 등장했고 그 결과 태고, 나옹 스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려말 3인의 선사로서 그 위상을 되찾았다.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 스님은 전북 고부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님의 생애를 전하는 비문이나 행장이 남아있지 않아 49세 이전의 자세한 수행이력은 전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스님의 활동이 가시화 된 것은 원나라로 구법여행을 떠나면서부터다. 홀로 수행의 길을 걷던 스님은 당신의 세속 나이로 54세 되던 해 늦깎이 구법승으로 중국의 산천을 떠돌며 선지식을 찾아헤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난 분이 바로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 석옥 선사는 달마로부터 시작돼 혜능과 임제로 이어지는 선의 법통을 잇는 대선지식이었다. 백운 스님은 석옥 선사와의 두 차례 만남을 통해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고려로 귀국한 다음해 홀로 정진하던 중 한 생각도 일지 않는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서 마침내 대자유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후 백운 스님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白雲)’처럼 무심과 무위로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지도하다가 1374년 한 줌 바람이 되어 적멸의 세계에 들었다.


▷요즘은 스님보다 스님께서 쓰신 『직지(直旨)』가 훨씬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직지, 직지 하는데 정작 그 뜻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직지’란 무슨 뜻인가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 아니겠소. 인연 비유의 방편, 언어, 문자에 구애되지 않고 단적으로 대도(大道)에 이른다는 선(禪)의 종지라 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법어, 문답, 게송 등에 선의 요체를 뽑아 수록하려 했다오.”

▷『직지』는 입적하시기 2년 전, 그러니까 75세 때 쓴 것으로 아는데 뒤늦게 직지를 편찬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나이야 뭐 중요하겠소. 해야겠다고 마음을 냈으니 그리 한 게지. 『직지』는 내가 원나라에 갔을 때 스승께서 주신 책이었소. 그런데 두고두고 보다보니 좀 더 포함됐으면 좋을 듯싶은 어록들이 있기에 첨가했지요. 뒷날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오.”

▷스님께서 입적한 후 『직지』를 간행하는데 비구니 묘덕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님과 묘덕 스님이 사랑하는 사이였고 특히 묘덕 스님은 권문세가의 딸임에도 스님을 사모해 출가한 것으로 드라마에 방영됐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묘덕 스님이 권문세가의 따님으로 어렸을 때 인도의 고승으로 고려와 계시던 지공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기도 했소. 20대 후반 남편을 잃은 후 그 분은 더욱 독실한 불자가 됐고, 많은 불사에도 기꺼이 동참하셨다오. 그러다가 50대 후반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으셨던 거요. 내가 하는 일을 많이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적인 사랑으로 몰고 가려는 ‘중생심’이 우습소.”

▷스님께서는 54세에 중국으로 향하셨는데 왜 가셨는지요? 또 거기에서 어떤 분들을 만나셨나요?

“나는 홀로 오랫동안 수행해왔고 그 수행의 정도를 점검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소. 그곳에서 나는 ‘무’ ‘만법귀일’ ‘부모미생전면목’ 등 화두를 앞세운 간화선 거장들과 만났지만 내 안목 때문인지 진전을 보지 못했소. 그러던 중 석옥 선사를 뵙게 된 것이오. 내가 글에도 남겼지만 스승의 은혜는 부모님보다 더하여 무겁기는 산과 같고 깊기는 바다와 같다오. 만일 그 때 무념의 참뜻을 내게 가르치지 않으셨더라면 어떻게 큰 해탈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겠소.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이오.”

▷석옥 선사께서는 입적하시기 전에 ‘흰구름(백운)을 사려고자 청풍까지 팔고 나니/ 온 집안이 텅 비어 뼛속까지 가난하도다/ 무릇 겨우 남은 한 칸짜리의 초옥일지언정/ 떠나면서야 병자동자(丙子童子, 백운)에게 부탁하는도다.’라는 사세송(辭世頌)을 스님께 전하셨습니다. 또 선사상 등으로 미뤄볼 때도 석옥 선사의 적통은 오히려 스님이 아니실까요?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어떤 두려움 없이 당당한 주인공으로 간다면 족한 것 아니겠소. 또 내가 스승을 흠모한다고 해서 그대로만 따른다면 던진 돌멩이만을 좇는 개와 다를 게 무어겠소.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나룻배일 뿐이요. 강을 건너면 내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게 선 아니겠소. 석옥 선사의 배를 타고 무심(無心)으로 건너간 건 태고 스님이나 나나 다를 것이 없소.”

▷스님께서는 공안에 의한 간화선을 거부하고 무념무심(無念無心)이라는 깨달음의 오묘한 경지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간화에 집착하는 것도 병이오.일체의 행하는 마음을 놓은 무심의 경지가 도리어 적극적인 선이라오. 그러니까 마음 그 자체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심이란 단순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망상이 끊어져 주객분별의 경계가 없는 상태인 게지요.”

▷당시 불교계가 혼탁하고 사회 또한 혼돈의 시대였던 것 같은데 스님께서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은둔의 삶을 고집하셨습니다. 사회문제에 너무 무관심하셨던 것 아닙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이 말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소. 다만 실천을 못할 뿐이지. 변화되지 않는데 소리를 높이는 건 소음과 다르지 않소. 『도덕경』에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라는 구절이 있듯이 말이 없는 실천이 수행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소.”

▷한 거사가 절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스님께서는 그 분에게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참으로 널빤지를 지신 분’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절을 짓는 건 큰 공덕인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절을 지은 건 큰 공덕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내세우는 순간 공덕이 아니라 상(相, 집착)으로 전락할 뿐이오. 더욱이 당시는 절이 없어 공부와 수행을 못하던 시절이 아니었소. 오히려 풍족과 욕망이 불가의 본래 정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나는 『원각경』의 말씀처럼 ‘말세의 중생으로서 생사에서 벗어나 모든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먼저 탐욕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거요.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인연(因緣) 복이고 인연 복은 사람과의 화합[人和]에서 나오며 그 인화는 마음의 조화[心和]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지 않소. 절 짓는 공덕이 아무리 크더라도 어찌 마음자리 밝히는 일과 비견될 수 있겠소.”

▷700여 년의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많은 이들이 직지를 얘기하고 직지를 간행했던 흥덕사를 복원했다고도 하오. 그런데 지금의 흥덕사를 누가 절이라 할 수 있겠으며 직지를 사랑한다고 외치지만 직지의 내용에는 종교의 영역이라며 애써 외면하고 있소. 나는 달을 가리키려 직지를 썼는데 모두 손가락만 뚫어져라 지켜보는 꼴이란 말이오.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겠소. 부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려 하시구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백운거사 어록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 자/ 무심하니 온갖 경계 한가로워라/ 오로지 본분의 일에 의지 하면/ 어디서나 있는 그대로 지키며 사네.’ (백운화상어록 중)

“항상 일체가 공임을 알아서 한 가지 법도 마음에 걸리지 않으면 그것이 모두 부처의 마음 쓰는 곳이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수행하라. 내가 지금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해서 그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재 만들어 사방에 흩어 뿌리고, 세상 땅 조금도 차지하지 말라.” (백운화상어록 중)

“부디 각자 노력하여 허망하고 더러운 정습을 버리고 곧 진정한 공부를 얻어야 할 것이오. 옛 사람도 이 하나의 큰일을 위해 잠자지 않고 밥 먹기를 잊으면서 몸과 목숨을 버리고 오랫동안 신고(辛苦)한 뒤에서야 비로소 성취했던 것이오. 대개 경솔한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어찌 이 위없는 묘한 도에 들어갈 수 있겠소? 그 목적을 따지면 다 생사의 큰일을 생각하고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스스로 굳세어 뜻을 굽히지 않고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 이렇게 근고한 뒤에 마침내 공업을 성취한 것이니, 이른바 어떤 법도 게으름에서는 생기지 않는 것이라 하겠소.”
 (백운화상어록 중)


찬탄과 평가

“공민왕이 그 사람됨을 알고 흥성사, 신광사 등에 머물러주기를 청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버렸다. 스님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여 내세울만한 공적이나 선행이 없이 예의가 바른 분이었다.”
 (고려말 이색)

“백운 스님은 천진하고 거짓이 없어 형상을 빌어 이름을 팔지 않았으니 진경에 노는 사람이었다. 후세의 배우는 이들도 이 법어를 보면 마치 어둠을 부수는 밝은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하여 실로 사숙의 지남이 될 것이다.”
 (고려말 이구)

“그의 많은 자연시, 산거시(山居詩)들은 단순히 자연만을 읊은 것이 아니다. 비록 불교적 어휘나 표현이 전무하다 하더라도 그 정신적 바탕에는 조사선의 오의(奧義)가 기층을 이루고 있는데서 그의 선시는 더욱 유현(幽玄)한 깊이를 지니게 됐다.”
 (고려대 명예교수 인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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