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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계(戒)와 율(律)의 차이

기자명 법보신문

계, 선행 이끌려는 자발적 도덕 규범
율, 승가질서 유지 위한 강제적 규칙

“계율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왠지 숨이 막혀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럼 뭘 하면서 살라는 거예요?”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불평이다. 이 불평 속에는 계율이란 출가수행자들이나 지키면 그만이지, 왜 우리 같은 재가불자까지 그 속박 밑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잠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계율=출가수행자의 율’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계율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계율이란 계와 율이라는 두 말이 합쳐져 이루어진 용어인데, 이 합성어는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는 그 용례를 발견할 수 없다. 즉 중국에서 한역되는 과정에서 계율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나고, 한국이나 일본불교도 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계율이라는 표현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로 구별되는 의미를 지니는 두 말이 하나로 합쳐져 사용되면서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만하다.

그렇다면, 계와 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계는 세간의 도덕이나 윤리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오계 가운데 불살생계라는 것이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방 안에 모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대로 두면 밤새 피를 빨릴 것이고 결국 뒤척거리다 날밤을 샐 것이 분명하다. 가렵지만 않다면 그깟 피 정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어 주겠지만, 물린 후의 가려움만은 용서할 수 없다. 결국 망설이다 두 손바닥으로 힘껏 모기의 몸을 터뜨려 죽이고 말았다. 손바닥 안에서 누구의 피인지 모를 묘한 습기가 느껴지고, 한 순간 찜찜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쫓을 걸 그랬나?” 이 경우 우리는 불살생계를 어겼다 하여 벌을 받게 될 것인가? 아니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모기를 죽이기 전에 느끼게 되는 망설임과, 죽인 후에 느끼는 찜찜함이다. 계란 바로 이런 것이다. 옳지 못한 행동을 앞에 두고 느끼게 되는 죄책감이나 갈등을 통해, 두 번 다시 똑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참회하고 이를 계기로 올바른 행동들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 이것은 좋은 습관으로 발전하고, 결국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평안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게 된다.

한편, 율이란 한 나라의 법률 내지 한 단체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통해 어떤 단체에 가입하려 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단체가 제시하는 회원조약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를 어겼을 때는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외국에 나갔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외국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그 나라의 법률 하에 있게 된다. 율도 이와 같다. 일반인이었던 사람이 출가라는 행위를 통해 승가공동체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는 승가가 제시하는 규칙에 따라야 한다. 만약 그가 따르지 않고 재가자일 때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승가의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소 강제적이기는 해도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출가자들이 수행에 전념하고 화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율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계와 율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우리는 계율이라는 합성어를 사용하며 이를 승가의 규칙으로서의 율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계에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강제성은 없다. 오로지 자발적인 정신력의 문제이다. 한편, 율 역시 계의 정신을 기반으로 지켜져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강제적인 규칙이라 해도 자발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언제 바닷물에 씻겨 나갈지 모를 모래성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윤리나 도덕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계 역시 사람인 이상 모두가 지니고 살아야 할 덕목이다. 특히 불교도라면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항상 계의 정신을 상기하며 악행에 대한 꺼림을 통해 자신의 심신을 평안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악행을 일삼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사람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선행의 실천’, 이것이야말로 불교도로서의 출발이자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이다. 
 
도쿄대 외국인 특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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