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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화가 난 사내의 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쌀』
수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나를 경멸하지 마십시오.

내 고향 펑향수에 홍수가 지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토록 살기등등하고 잔인하고 술수가 판치는 도시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풍요로운 내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흘러간 도시는 내게 조금도 따뜻하게 품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약점을 알고 나를 거리의 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마음도 정신도 자존심도 없는 무정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떠합니까? 내가 한 줌도 갖지 못한 쌀을 바리바리 가진 저들이 벌이는 세상은 온통 서로를 속고 속이고 죽고 죽임을 당하는 아수라장일 뿐이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덮기 위해 나를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저들은 나를 마음껏 조롱하고 경멸하고 능욕하였습니다. 가진 자의 텃세는 이렇게 한 인간을 철저하게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세상은 언제고 뒤바뀐다는 사실을.

쌀가게집의 두 딸과 차례로 혼인을 올리면서 이제 나는 권력과 부를 쥐게 되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며 지내온 내게 이제야 때가 온 것입니다.

나는 내가 당한 것과 아주 똑같이 그들을 조롱하고 능욕하였습니다. 저항하는 자는 목숨을 빼앗아버렸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비열하고 잔인하게 대하였습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섰습니다. 모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나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더욱더 분노하게 만드는 기폭제였습니다.

나는 세상에 화가 났습니다. 나를 이렇게 천애 고아로 만들었고 고향을 떠나게 하였으며 애정도 없는 결혼을 하게 만들었고 저 원수 같은 자식놈들을 먹여 살리게 만든 이놈의 세상! 하나같이 내 돈을 뜯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언제라도 나를 짓밟고 올라서려고 틈을 노리고 있는 이 세상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저 비열한 동태에 질리면 나는 쌀창고를 찾아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정직한 것은 쌀입니다.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악을 저지르지만 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을 내는 저 쌀. 쌀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냄새를 맡고 있자면 아득한 고향의 추억이 나를 감싸 안습니다. 매끄럽고 차디찬 쌀의 감촉은 이글이글 타오르던 나의 분노를 식혀줍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내게는 세상에 대해 화를 낼 기력조차도 사라졌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나는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꿈을 실현하려 합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에 이 향긋하고 사랑스러운 쌀을 실어주는 일입니다. 화물차 한 냥을 빌려서 가득 쌀을 싣는 내게 아내는 죽는 마당에 돈을 헤프게 쓴다고 화를 냅니다.

고향으로 달리는 기차 안, 쌀더미 위에 누워서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유년의 추억들, 황금빛 들녘, 첫사랑의 아련함….

아, 그런데 갑자기 내 입이 벌려집니다. 작은아들이 내 입에서 황금틀니를 뽑아 갑니다.
세상의 성자들이여, 나를 설득해 보십시오.
그래도 세상이 살 맛 나는 곳입니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입니까?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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