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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편조 신돈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고통받는 중생 외면하고 어디서 도를 구하리오

인간은 역사를 규정하고 그 역사는 다시 규정된 인간을 만든다. 이는 기록된 자료와 그 평가 잣대에 의해 한 인물이 오래도록 위인이나 악인으로 존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려말 편조 신돈(遍照辛旽, ?~1371) 스님은 여말선초 개국공신들에 의해 작성된 『고려사』를 통해 지난 600여 년 간 요사스럽고 삿된 승려로 낙인찍혀 왔다. 고려사는 물론이고 한국사에도 유일하게 수행자가 최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지난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신돈 스님은 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공민왕의 전격 등용에 의해 정치에 입문한 후 기득권층에 맞서 왕권강화와 민생구제를 실현하려 했던 ‘비운의 개혁가’라는 것이다.

편조 스님은 오늘날 경남 창녕 지역인 영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유력자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 그는 어려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됐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항상 산방에 거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명하고 자애로웠으며 매사에 명백히 논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스님은 출가 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승으로 숭상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스님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은 공민왕 14년인 1365년이었다.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편조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공민왕은 그를 ‘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離世獨立之人)’이라며 아홉 번의 절을 올린 뒤 스님을 사부로 모셨다. 공민왕은 이후 절대적인 신임으로 모든 권한을 스님에게 위임했고 스님 또한 왕의 기대에 부응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를 주민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막대한 권력가라도 죄가 있으면 물었고, 젊은 인재들을 길러내고자 했다. 이런 편조 스님을 두고 권력자들은 요승이라 했지만 민중들은 ‘성인’·‘문수의 후신’이라며 환호했다.

그렇게 6년. 하지만 궁지로 몰린 기득권층과 유학자들의 저항과 암살음모, 음해와 모략이 잇따랐고 결국 1371년 7월 반역자라는 오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스님은 요승(妖僧)과 신승(神僧)이라는 상반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요승인 동시에 신승이고, 깨우친 자인 동시에 미혹한 중생이오. 나는 이상이 추구한 개혁가이며 권력을 추구했던 삿된 정치인이외다. 나는 승려라는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났기에 그렇고 누구보다 중생에 다가가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소. 또 뒤틀린 것을 바로 잡으려 했기에 그렇고 권력이라는 자리에 머물렀기에 그렇소.”

▷스님께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이 출가자라는 입장에서 바람직했다고 보시나요?

“정자정야(政者正也)라,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소. 우리 불제자들이 지향하는 세상 또한 괴로움이 없는 세상 아니겠소. 삿됨을 깨고 바름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불교의 정신이 정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오.”

▷그래도 임금께 조언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어땠을까요? 그것이 오랜 우리 승가의 전통이 아닙니까?

“승가의 전통이라. 지배계급에 영합한 절집들은 방대한 토지와 수천수백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절 토지를 부치는 농민들한테는 엄청난 소작료를 거둬들였소. 또 고리대금업에 술을 파는 양조사업, 심지어 매춘사업에까지 손을 댔소. 승가의 전통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였지요. 기득권의 착취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확 바뀌지 않으면 불교는 물론 나라조차 멸망의 길밖에 없었소.”

▷지금도 성승(聖僧)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태고 보우 스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우 스님은 ‘사승(邪僧)’이라고 스님을 비난했고, 또 스님은 왕사로 있던 보우 스님을 축출하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와 그는 많이 달랐소. 출신과 종파도 달랐고 지향하는 세계도 달랐소. 그는 이른바 잘나가는 선종의 수장이자 명덕태후와 동성으로 권문세족들의 비호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옹호하고 그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소. 하지만 나는 쇠락한 화엄종 승려였고 내세울 가문도 전혀 없었소. 나는 그의 법이 높고 낮은지를 판단하지 않지만 그가 기득권 세력에 편입돼 활동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보았소.”

▷하지만 고려사 등 기록에 스님은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더라도 스님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조선 세종조차 ‘고려사의 공민왕 이하는 정도전이 들은 바라 따라 필삭했고 다른 곳도 많으니 어떻게 후세에 전하겠느냐.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하지 않았소. 고려사 편찬자들은 역사적 사실이야 어쨌든 나를 철저히 짓밟는 게 조선건국의 명분이 선다고 생각했을 건 자명한 일이오. 하지만 아무런 기반도 없던 내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7년 가까운 세월을 어찌 견딜 수 있었겠소.”

▷한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사실은 스님의 아들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돼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파렴치한 모략일 따름이오. 우왕께서 어린 시절 우리 집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 누구나 인정했듯 공민왕의 아드님이시오. 그 분이 강녕부원대군에 책봉될 때에도, 왕위에 오를 때에도 심지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해 폐위될 때에도 그분의 정통성은 전혀 부정되지 않았소. 하지만 우왕이 복위를 꾀하다 실패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내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됐소. 누가 봐도 정치적인 음해란 생각이 들지 않겠소.”

▷그러면 공민왕이 별다른 배경도 없던 스님에게 정권을 맡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려말은 모든 분야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했소. 특히 기득권층의 권력이 막강한 상황 속에서 임금의 개혁의지가 쉽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오. 그 때문에 임금께서는 소승으로 하여금 이들의 공고한 권력기반을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해 민생을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아오. 그 뜻이 옳기에 나 또한 임금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이오.”

▷스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꾸려고 하셨습니까.

“토지와 사람의 소유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였소. 이것이 곧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길이었소. 지배층들의 엄청난 토지 소유가 일반화되면서 민생 파탄과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지요. 나는 빼앗긴 농민들의 땅을 되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화했소. 또 과거 제도의 개혁 등으로 이색을 비롯해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 20~30대의 패기발랄한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려 노력했소.”

▷‘버선까지도 반드시 이마에 받들어 공경히 이를 보냈다’고 할 정도로 스님을 의지하던 공민왕이 결국은 스님을 저버렸습니다. 스님께서는 혹시 역대 고려 임금 중 가장 똑똑하고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공민왕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소. 공민왕께서는 나를 없애려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 보호해 주었고, 나 또한 그 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소. 그러나 임금도, 나도 역부족이었소. 쓰러져가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말이오. 원망은 헛될 뿐이오.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최선을 다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하는 것이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소.”

▷스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승가의 자율과 평등이 확대된 사회였소.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고 누구든지 이상을 향해 노력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내가 꿈꾸던 부처님 세상, 연화장 세계였소.”

▷마지막으로 요즘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능가경』에는 ‘보살이 열반을 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열반’이라고 했소. 진리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일 뿐이오. 지금 이 자리, 이 사바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외면하면서까지 구해야 할 열반이나 해탈은 없소.”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민현구 「신돈의 집권과 그 정치적 성격」, 강은경 「고려후기 신돈의 정치개혁과 이상국가」, 홍영의 「신돈-요승인가 개혁정치가인가」, 정선용 「신돈, ‘요승’ 이름 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김영수 「고려말 신돈의 정치에 대한 연구」, 김성동 「뒤집어서 보는 한국불교 역사-신돈과 당취」, 이계표 「신돈의 화엄신앙과 공민왕」, 신일균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보우·신돈의 갈등」 등


편조 어록

“저는 산수간의 한 승려인데 임금께서 억지로 이에 이르게 했습니다.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여 간악을 제거하고 현량을 등용하여 삼한의 백성이 조금은 평강을 얻게 한 후에 장차 일의일발로 산림에 돌아가고자 합니다.”
 (고려사 열전 반역 신돈전)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토지는 힘 있는 자들이 빼앗았다. 이미 땅 주인에게 돌려주라 판결했지만 그대로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크게 두었다. 이로써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를 여위게 하고 있다. 이제 도감을 두어 이를 관리케 하되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나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죄로써 다스릴 것이다.”
 (고려사 열전 반역 신돈전)


비판과 찬탄

“날이 갈수록 탐욕스럽고 음탕해져서 뇌물을 문이 미여지도록 받아들이고 집에 있을 때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마음대로 성색(聲色)을 향락하다가도 왕 앞에서 청담(淸談)을 하고 음식도 채소, 과일, 차만 먹었다.” (고려사 편찬자)

“고려사의 편찬이 정치적 문제 때문에 많이 논란되고 개필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시킨다는 점에서 우왕, 창왕을 신 씨로 몰았을 뿐 아니라 이들과 연결되는 신돈을 사실 이상으로 악평했다.” (고려대 민현구 교수)

“신돈은 공민왕의 정치적 방종을 묵인하고 조장함으로써 그의 권력을 지켰다. 즉 신돈의 정치는 표면적으로는 개혁적이었으나 내적으로는 그 반대였으며 단지 공민왕을 대리한 정치였다.”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김수영)

“나날의 삶이 지옥 같기만 한 중생들의 삶과는 관계없이 지배자들에게 아부, 아첨하여 그들이 던져주는 밥찌꺼기나 핥아 먹는 호권불교로 스스로의 지위를 떨어뜨려버린 고려 귀족불교의 반민족적·반민중적 해악을 뒤집어 민족과 민중의 기둥으로 불교를 다시 우뚝 세우고자 했던 스님이 있었으니 바로 편조 신돈 스님이다.” (소설가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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