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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월초 화상으로부터 부름을 받다

기자명 법보신문

무지한 백성 일깨우는 것도
일제를 상대하는 독립운동
봉선사 강원에서 공부 지시

성숙은 본사인 봉선사로 가지 않고 용문사에서 더 공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곡 스님이 왜 자신을 봉선사로 보내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언젠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점을 용문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봉선사로 가야만 하는 시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풍곡 스님은 봉선사로 가기를 꺼려하는 성숙을 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거라”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 후로도 용문사에서 사미승이 배워야 할 외전을 공부하던 성숙은 이듬해인 1918년 여름 봉선사 월초 화상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으로 바랑을 짊어지고 봉선사를 찾은 성숙은 월초 화상과의 첫 만남에서 스승인 풍곡 스님의 모습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는 구석이 있었고, 다르다면 풍곡 스님이 시종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비해 월초 화상에게서는 부드러움과 함께 강인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삼배의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은 성숙을 묵묵히 지켜보던 화상은 “네가 성숙이냐”하고 짧게 물었다. 성숙이 “예, 원래 이름은 성암이고 불가에 입문해서 성숙이라는 이름을 받아 그리 쓰고 있습니다”하고는 제법 성의를 다해 답했다. 그러자 화상은 느닷없이 “너 이놈 성숙아! 네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러 봉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느냐”하고 물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성숙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지금이 기회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 큰스님. 기회가 된다면 독립군이 되어 나라를 찾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싶습니다. 나라를 찾은 후에 다시 불경을 공부하고 스님생활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하고는 화상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성숙의 말을 듣고 잠자코 있던 월초 화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화상은 “성숙아,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꼭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맞서 싸우는 것만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글을 모르고 배운 것이 없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여기서 네가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다 배워 그 사람들을 가르치고, 분연히 떨쳐 일어날 수 있도록 계몽하는 것도 독립운동과 다르지 아니할 것이다”하고는 무지한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일도 독립운동과 다름없음을 역설했다. 그리고는 “용문사에서 사미가 배워야 할 외전을 배웠으니, 이제 여기 봉선사 강원으로 와서 내전을 공부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전을 다 배운 후에도 네 생각이 변하지 않거든 그때 떠나도 늦지 않을 것이다”하며 봉선사 강원으로 와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성숙은 화상의 그 말에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 큰스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강원교육체계는 오늘날의 불교강원 교육체계보다 밀도가 높아 치문반에 해당하는 사미과 이후에 배우는 사집과 과정이 2년, 사교과 과정이 4년 정도였다. 거기에 대교과까지 배워야 하니 불교 내전을 다 배우려면 족히 10여 년은 더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니 성숙에게 내전을 다 배우고도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떠나도 좋다고 한 월초 화상의 말은 떠나지 말라는 말과도 같았던 것이다.

월초거연(月初巨淵) 화상이 어떤 분인가. 월초 화상은 1906년 동대문 밖의 원흥사에 현재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세워 청년 승려들의 교육을 시작했던 스님이다. 그리고 1913년에 봉선사 주지로 추대되어 왔을 때 일부 스님들이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님들을 설득하여 반대의견을 무마시키고 주지 직무를 수행하면서 사세를 확장하는데 성공했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어디 그뿐인가. 월초 화상은 1927년에 사재를 들여 개운사에 강원을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 1934년에는 앞서 1927년에 개원했다가 문을 닫았던 홍법강원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사재 2만 8천여평의 토지를 들여 봉선사에 제대로 된 홍법강원을 설립해 손상좌인 운허 스님으로 하여금 인재양성에 힘쓰도록 하는 등 교육에 큰 뜻을 품고 실천했던 분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부에서 조선총독부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스님은 단 한번도 일제에 협조하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하다가 스님이 된 운허 스님을 일본경찰들로부터 보호했고, 3·1독립만세운동 때에도 한용운 등 그 주역들을 도울 정도였으니 독립운동만을 놓고 보더라도 성숙보다 한참이나 먼저 발을 디딘 셈이다.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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