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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3. 고통①-한하운의 ‘보리피리’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이 火宅이니 버리지 않으면 길 없다

<사진설명>태자 싯다르타가 모든 생명의 고통을 깨닫는 계기가 된 사문유관.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름은 자살공화국! 시민의 삶은 편하지 않다.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물다. 죽지 못해 산다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자살하는 자가 교통사고로 죽는 이를 넘어섰다. 일찍이 나병 환자 시인 한하운은 고통에 대해 절절하게 노래하였다.

보리 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필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꽃 청산/어릴 때 그리워/피ㄹ 늴리리//보리 피리 불며/인환(幾山)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피ㄹ 늴리리//-한하운의  ‘보리피리’ 전문

하늘과 인간이 모두 버린 천형의 병, 한센병. 부모도 형제도 버려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어디서나 돌팔매질뿐인 저주받은 인생, 문둥이의 삶. 그나마 방랑을 지탱해 주던 발가락이 하루 지나면 썩어 달아나고 피맺힌 한을 글로 승화시켜 주던 손가락이 또 하룻밤 만에 몸에서 떨어져나갔을 때 시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들은 사람과 공동체, 일상은 물론, 고향과 추억으로부터도 소외된 이들이다. 보리피리 불며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고향의 봄 언덕을 그려 보지만 그곳은 갈 수 없는 나라. 보리피리 불며 진달래가 흐드러진, 그 진달래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화전도 해 먹던 그 동산, 그 동무들 떠올리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설사 몹시 가난하여 굶주리고 이웃끼리 서로 반목을 일삼는다 한들 그리 부대끼며 사는 일상은 그런 대로 재미있고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단 하루라도 그리 서로 모여 속살 비벼대며 살갑게 정을 나누고 술잔 부딪히며 슬픔을 나눌 수만 있다면 굶주린들 어떠리? 그렇게 아무도 반기는 이 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기 몇 년이고 가는 곳마다 쫓겨나 돌아다닌 땅은 또 얼마이던가? 설움과 한과 비통함으로 점철된 삶, 모두 보리피리 소리로 날려 보내고 오늘도 또 한 고개를 넘는다.

한센병 환자보다 낫겠지만, 우리 모두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을 하고 윗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수모를 당해가며 살아가는 자체가 고통이다. 사랑하는 자가 없을 때는 외로워서 괴롭고, 사랑할 때는 사랑을 지키느라 편치 않다. 출세하지 못하면 핍박받아 괴롭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자리를 유지하느라 삶은 늘 버겁다. 그 아름답던 얼굴도 한때뿐이어서 곧 주름살이 늘고 그 당당하던 기상도 세월이 가면서 시나브로 희미해지니 이 또한 고통이다. 항상 건강한 것만은 아니어서 내 육신이 곤고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병마로 신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리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너와 나 모두 잔치를 파하고 돌아가는 손님처럼 이승과 작별을 해야 하니 이 또한 괴로움이다. 삶에 대한 인식은 여기서 비롯된다. 이렇게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이루어진 삶 자체가 고통이란 것을 깨닫는 데서.

인간 존재 속성 자체가 고

생노병사만이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물과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지내야 하니 고통이요[怨憎會苦], 진정 사랑하면 같은 지붕이라 하더라도 안방과 건넌방으로 나뉘어 있어도 그리운 법인데 사랑하는 이들과 늘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것도 고통이다[愛別離苦]. 이 모든 고통이 오는 것은 왜일까? 인간의 삶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라 어느 누구도 욕망하는 것, 소망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求不得苦]. 그리고 이들 고통은 오온(五蘊)의 고통으로 귀결된다[五取蘊苦]. 생노병사와 증회, 애리, 구소불득의 7고가 날마다 오온을 공격해오기에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대부분의 철학이나 종교가 갖은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말하며 행복의 길을 안내하지만 불교는 고통과 직접 대면하라고 권한다. 우리 삶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계(三界)가 다 고통이니 인간 세상이란 불난 집[火宅]이다. 중국 승려들은 사람의 얼굴 자체가 고(苦)자 모양이라고 한다. 눈썹은 초두(艸)가 되고 두 눈과 코가 열십자(十)자를 이루며 입이 구(口)자 형상이어 사람의 얼굴 자체가 고(苦)란다. 인간 존재의 속성이 고란 것이다.

이렇게 삶 자체가 고통이고 세상이 불난 집이며 인간 존재의 속성 자체가 고라면 우리가 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답은 간단하다.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는 것이다. 모든 고가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되니 이를 버리고 정진할 일이다.

삼국유사엔 이 문제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친구인 광덕과 엄장이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 서로 열심히 수행 정진한다. 광덕이 먼저 부처가 된다. 다음날 엄장이 광덕의 거처를 찾아가니 과연 광덕이 죽어 있었다. 엄장은 광덕의 장례를 치르고 친구의 아내와 같이 살기로 한다. 밤이 되어 정을 통하려 하니 광덕의 아내가 단호히 거절하며 “이러고도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가히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라고 말한다. 엄장이 놀라 광덕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광덕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10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몸에 전혀 손을 대지도 않은 채 단정히 하고 16관법으로 정진만 하여 결국 왕생을 이루었노라고 답한다.

광덕 처의 말을 듣고 엄장은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자가 어찌 엄장뿐이겠는가. 광덕처럼 욕망과 집착의 완전한 소멸 없이 깨달음 또한 없다. 이를 위해 자신의 성기를 자른 스님도 있었다. 설사 성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몽정이나 발기 현상처럼 꿈이나 무의식의 영역에서조차 욕망을 소멸시켰을 때 7고가 사라지리라.

하지만 이 경지에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바람과 빛만을 벗 삼아 암자 속에서 선정삼매에 든 스님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스님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시장 가운데서 그것이 고통인 줄 알면서도 욕망과 더불어 뒹굴어 사는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삼국유사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도 전한다. 둘 모두 산 속에서 수행 정진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한 여인이 찾아와 재워 달라 한다. 박박은 단호히 여인을 물리치나 부득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먼저 부처가 되는 것은 부득이다.

박박이나 의상식의 수행은 엄정하여 불법의 고고함과 거룩함을 지켜낸다. 북극성처럼 지표가 너무도 분명하여 흔들림 없이 도의 길을 갈 수 있다. 엄격한 계율로 모든 욕심과 나를 버려선 청정한 세계에 이른다. 그러나 거룩하면 먼 법이어서 감히 범인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렵다. 너무 엄격한 나머지 사람의 따스한 숨결이 깃들기 어렵다.

범인과 뒹굴며 깨달음 구해

부득이나 원효식의 수행은 인간의 얼굴을 하였다. 생활 속에서 추구할 수 있다. 범인들과 한데 뒹굴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다. 범인들도 능히 미칠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신처럼 완전하지 못하여 죄와 실수가 오히려 깨달음의 길이다. 그러나 거룩하지 못한 만큼 도를 훼손시킬 수 있다. 지표가 분명하지 않아 자칫 도의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암자의 불교와 시장의 불교라 할 양자는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한 것이 아니다. 차이만 존재한다. 의상이 사랑을 고백하는 아리따운 아가씨 선묘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오히려 불법으로 인도한 행위는 계율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임을 넌지시 말해준다. 원효가 승려의 몸으로 요석공주를 받아들여 관계하여 아이까지 낳은 행위는 진정한 불법의 길이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리게 한다. 의상이 계율을 엄격히 지켜 나를 잊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승려의 표본으로 두고두고 기려져야 한다면, 원효는 계율마저 인간의 입장에서 회통시킨 달관의 화두로 계속 되새겨야 하리라.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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