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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년 6개월만에 가족 상봉

기자명 법보신문

월초화상 지시로 가족 이주
철산 떠나 경기 고양에 정착
부인에 “미안하오” 한 마디


월초화상을 만나고 용문사로 돌아온 성숙은 풍곡 스님을 찾았다. “스님, 본사로 가서 공부를 계속 하겠습니다.” 성숙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풍곡 스님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제자를 떠나보내면서도 오히려 “봉선사로 가거든 큰스님을 네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하거라. 큰스님이 네게 큰 가르침을 주고 앞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하고는 봉선사로의 발길을 재촉하도록 독려했다.

성숙은 다음날로 짐을 챙겨 봉선사로 향했다. 지금은 조계종에서 스님이 되려면 반드시 강원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당시의 강원은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수익자 부담이었기 때문에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도 배우는 만큼의 돈을 내야 했다. 스님들이 내는 돈은 양식 값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성숙이 봉선사로 온 이후 공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월초 화상이 감당했다. 성숙이 봉선사로 옮기고 며칠 지나지 않아 월초 화상은 조용히 성숙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화상은 “성숙아. 너 고향에 기별을 넣어서 고향 가족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오도록 해라”하고는 성숙의 반응을 살폈다. 그때까지도 화상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성숙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되묻자, “부모님은 물론이고 결혼한 처가 있으니 이곳으로 옮겨서 생활을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너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질 것이 아니겠느냐”하고는 고향 철산에 기별을 넣으라고 다시 한번 일렀다. 성숙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월초 화상은 고향의 가족이 가까이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훌쩍 떠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월초 화상은 훗날 운허 스님에게도 같은 방편을 써서 운허 스님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했다.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던 운허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만주로 떠나 옛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기는 신세가 되어 봉선사로 돌아오자 아예 속가의 처자식을 봉선사 인근 마을로 이사하도록 한 일이 있다. 월초 화상은 지금 훗날 운허 스님에게 썼던 방편을 앞서서 성숙에게 쓰고 있는 것이다. 성숙은 고민 끝에 가족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가까이 있으면 덜 미안할 것도 같아서 인편을 통해 고향에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이사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동생 성호에게는 따로 글을 보내 작은 시골마을에 있지 말고 큰 도시로 나와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익힐 것을 당부했다.

성숙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마침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쉽게 이주를 결심할 수 있었다. 논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식구가 밥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한 상황에서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월초 화상은 성숙의 가족이 서울 수국사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국사는 본래 1415년에 세조의 명에 의해 창건된 조선왕조의 원찰이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을 1900년대에 들어서 월초화상이 고종 임금의 시주를 받아 중건한 사찰이다. 그러니 월초화상의 말 한마디면 토지를 경작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성숙의 가족은 수국사 토지를 경작하면서 경기도 고양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가족이 철산에서 고양으로 이사하던 날, 성숙은 월초화상의 말에 따라 가족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남겨두고 온 부인 정 씨를 2년 6개월만에 만났다. 성숙은 부인을 보면서 잠시 멈칫했다. 부인이 아이를 하나 업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성숙이 고향을 떠날 때 이미 태중에 있었고, 철산을 떠난 이듬해에 아비 없이 태어났다. 그 아이가 훗날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 성숙의 옥바라지며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냈던 딸 김숙녀다.

아버지 문환 씨와 어머니 임천 조씨, 그리고 부인 정씨는 집을 떠난 지 2년 반만에 스님이 되어 자신들을 남쪽으로 불러들인 성숙을 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성숙은 더 이상의 침묵이 어색해 헛기침을 하고는 여덟 살 아래 동생인 성호에게 잘 지냈느냐는 인사를 건넸다. 이제 열세살인 성호와 막내인 일곱 살 보구는 형이고 오빠인 성숙을 보고는 그 행색과 관계없이 마냥 기뻤다. 그동안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속가의 예로 큰 절을 올린 성숙은 “이제 이곳에서 편히 계세요”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는 만나는 순간부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시부모님과 성숙을 번갈아 바라보던 부인 정씨와 마주섰다. 지극한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던 성숙이 한 말이라곤 “미안하오. 아이 잘 키워주시오”단지 이 두 마디뿐이었다.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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