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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앞에서 글 쓴다는 마음으로 써라

기자명 법보신문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2004년 12월14일 아침 8시52분에 책의 첫 페이지를 열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뒤 2005년 1월19일 새벽 1시35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정독기간입니다. 매일 번역을 시작하기 전 책상 앞에서 조금 씩 읽어나갔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절망하지 마. 조금만 자신을 돌아봐. 네 자신을 지켜.”

가만히 귀 기울이자니 철창에 갇힌 지식인의 탄식어린 술회였고 그 속에서 억지로나마 자신을 다잡고 일으켜 세우려는 두 날개가 꺾인 수인(囚人)의 처절한 독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애잔한 감상으로만 만나기에 이 책은 그 메시지가 너무나 웅장하고 묵직하였습니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구절이 등장하였습니다.

“… 포연이 자욱한 알제리 사막의 벙커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밤을 지새우면서 아프리카 탐험기를 탐독하던 그날이 지금도 아름다운 독서의 추억으로 남아 있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손때 묻은 책들이 지금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오. 책은 언제나 인생의 동반자이고 책 속에 길이 있는 법이오.”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 독서에 관한 이리도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까요? 차디찬, 혹은 폭염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감방 속에서 그는 이런 추억으로나마 삶의 아름다움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요, 그 힘은 그로 하여금 다시 학문의 열정을 불태우게 하였으리라 상상해봅니다.

저자는 해박한 인문 학자답게 나를 가르쳤고 때로는 영롱한 언어로 나를 달뜨게 만들었고 겨레의 정신을 되풀이해서 강조할 때는 겉멋에 취해서 잠시 정신을 잃고 살았던 내 자신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그는 책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당부하고 또 당부하였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소걸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는 “에이, 후딱 읽어치우자”라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 속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의 심장이 담겨 있다”라는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화급한 번역 틈틈이 이 책을 읽어갔다. 시류에 영합하려던 내 의식을 이 책은 단단히 옭아매 초심으로 나를 돌려놓았다. 얕은 문장으로 기갈에 시달리던 내 가슴을 이 책은 너른 바다 시퍼런 비늘달린 문자의 너울 속을 힘차게 헤엄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내게 ‘글이란 스승 앞에서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한다’는 일갈로 내 심장을 바싹 조여 주었다. 그래서 행복한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다. 2005년 1월19일 새벽 1시35분”

나는 이렇게 서툰 소감 몇 구절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여백을 채웠고 그리고 덮었습니다. 지금 내가 써대고 있는 글들이 과연 내 스승님 앞에서 온전한 정신과 맑은 지성을 담아내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저 깊은 과거에서부터 푸르른 미래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후 이 책을 다시 펼칠 때마다 나는 두렵기만 합니다.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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