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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4. 고통②-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기자명 법보신문

緣起 발견하면 고통이 클수록 깨달음도 깊다

<사진설명>지진으로 폐허가 된 파키스탄의 참사현장에 각국의 구호손길이 전해져 고통을 함께 나눴다. 사진제공 한국 JTS.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이를 승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욕망에도 존재하려는 욕망과 연기를 깨달아 타자와 공존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처럼, 고통도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보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수모와 굶주림을 겪으며 일생을 방랑하는 커다란 고통을 겪었기에 이제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삶의 진정한 실체를 접하였고 이의 의미를 주옥처럼 엮어 시로 토해내었다. 베토벤이 귀가 멀지 않았더라도,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를 오선지 안에 담아 서양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삶의 깊이가 절절이 밴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비단 위대한 이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평범한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실패에서 겸손을 배우고, 절망으로부터 비전의 꽃을 피우며, 남다른 번뇌와 고독을 통하여 참 진리를 깨닫는다. 가난의 고통 속에서 따스한 성품을 기르고 모든 가난한 자가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한다. 가슴을 면도날로 저미는 듯한 실연을 거쳐야 진정한 사랑을 깨달으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 뼈저린 좌절을 겪고 나서야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좀 더 따뜻하고 넉넉한 인품을 갖추게 된다. 이처럼 가난, 절망, 좌절, 번뇌로 겪는 고통은 비극의 동의어가 아니라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깨닫는 문이자 그 전에는 감추어져 있던 인간 존재의 심연에 다다르는 길이다. 어두울수록 별이 맑게 빛나듯, 고통이 클수록 세계와 인간의 의미는 깊어진다.

모든 것이 풍족한 이 시대, 고통이 없어서 삶은 이리도 천박한 것이 아닐까?

원효식이든, 의상식이든 한 사람의 고통은 이런 방식에 의해 승화될 수 있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은? 불교 철학이 체계화하던 당시 지배층은 사회적 고통을 개인적 고통으로 치환하여 고(苦)에서 사회성을 제거하였다. 노예로, 농노로, 노동자로, 단지 피지배계급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난과 억압과 착취, 소외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의 뼈마디 시린 고통, 사회적인 모순이 낳는 고통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은 것이다. 부당하게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 그는 행복한가? 설사 그들이 극락정토에 가서 왕생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살아서 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범인의 차원에서 보면,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더 좋지 아니한가. 대승의 이념대로 고에서도 사회성을 복원시켜야 하리라.

세상의 고통은 나의 고통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가지/이러다간 끝내 못가지//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기름 투성이 체력전을/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이 전쟁같은 노동일을/오래 못가도/끝내 못 가도/어쩔 수 없지(중략…)//늘어처진 육신에/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분노와 슬픔으로 붓는다.(중략…)//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줏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부분

밤일을 해본 이들은 그 고통과 어려움을 안다. 찰나의 순간만 졸아도 재봉틀에 손가락을 박고 있고 절단기에 다리를 넣고 고층빌딩 공사장에서 허공에 발을 디디는 것이 밤일이다. 밤일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수면욕과 싸우며 수행해야 하는 고강도의 노동이다. 그러기에 ‘전쟁 같은 밤일’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더구나 시적 화자는 이 일을 밤참도 없이 빈속에 행하였다. 긴장감에서 벗어난 육체는 비로소 위장이 비었음을 알리고 노동자는 밥 대신 차가운 소주를 들이붓는다. 그도 안다. 이 소주가 망가진 위장에 독이 됨을. 그런 줄 알면서도 소주를 붓는 이유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이다.

이 시에서 현실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그에 대한 정당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군부독재 시대의 노동자의 삶이다. 그는 짬밥을 먹고 전쟁 같은 밤일,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고혈을 짜내어 치러야 하면서도 과도하게 착취당하여 임금이라고는 겨우 내일의 노동을 유지할 정도로 주어지고 생산은 물론 노동과정과 인간다운 삶에서 철저히 소외된 이 땅의 노동자다. 그들은 국가와 자본의 유착으로 인하여 최소한의 저항마저 철저히 봉쇄당하여 이미 병든 몸이 곧 스러져갈 것을 알면서도 쓰린 소주 한 잔으로 새벽의 허기와 분노를 달래야 한다.

이 시엔 노동자가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데서 오는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 개인의 고통에 머물지 않고 한 개인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한 노동자의 삶은 그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전체 노동자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 옮겨가고, 이 인식은 곧 부조리한 사회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이어진다. 한 인간의 비극과 부조리한 세계에서 빚어진 극도의 고통 속에서 시인은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노동자의 사랑과 정당한 분노, 희망을 바탕으로 한 단결과 연대만 있다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햇새벽’이 열리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이 바로 고

여기서 소주의 위상은 두 차례 전이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진통제들이 고통의 예방 시스템으로 작동한 것처럼, 처음에 노동자가 몸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밥 대신 소주를 마신 것은 전쟁 같은 밤일의 고통을 달래주려 마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노동자의 몸은 이를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한다. 이 인식은 분노와 저항으로 승화한다. 술잔을 돌리면서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동지애가 싹트고 이는 연대를 형성한다. 사랑과 단결을 바탕으로 한 연대를 만들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햇새벽-에 대한 희망이 솟아오른다. 진통제의 소주는 노동하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저항의 소주로, 술잔을 돌리는 동지애를 통하여 연대와 희망의 소주로 변모하는 것이다. 고통이 현실의 맥락에 놓이고 타인들을 바라보면, 추상성과 관념성, 고립성을 벗어나 구체성과 연대성을 획득한다.

모든 고통은 사회적이다. 태국의 스님이자 환경 및 평화 운동가인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도 구조적 폭력이 바로 고(苦)라고 선언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살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간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매일 1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 고통의 원인과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가. 지금 현재 아프리카 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인데, 백인들이 오기 전까지 그런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 세상 모든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반야를 얻으려는 이들은 현실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근본에서부터, 연대를 통해 해소하려는 이들이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참사에서 지구촌 사회가 발견한 빛은 전 세계인이 고통의 연대를 세계적 차원에서 구성한 것이다.

한하운의 시가 개인적 고통의 몸부림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면, 박노해의 시는 사회적 고통에 대해 그리 하고 있다.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은 둘이 아니다. 개인적 고통이 곧 사회적 고통이란 자각을 할 때 고통은 넓이를 갖는다. 사회적 고통이 곧 개인적 고통으로 내면화할 때 고통은 깊이를 갖는다.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개인의 해탈과 사회 변혁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해탈이리라.

반야로 고통의 근원과 모순을 인식하고 연기적 세계관으로 타자들을 바라보아 심성을 계발한 이들끼리 연대를 하여 인간이 모두 소중한 사회, 구조적 폭력과 고통이 없는 사회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모두가 해탈을 이룬 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때 서 있는 내 발 밑이 바로 도솔천이라고 노래하지 않겠는가.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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