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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요체 신심명 남긴 승찬의 향기 가득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3. 산곡사(山谷寺·삼조사)

<사진설명>삼조사 주지 관용 스님을 비롯해 30여 명의 대중이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2조 혜가 스님은 승찬(僧璨)에게 “여래께서 법을 가섭에게 주셨고, 그렇게 차츰차츰 전하여 나에게 이르렀는데 내가 이제 이 법안을 그대에게 주고 아울러 가사를 주어서 법의 신표로 삼겠다”며 법을 전하고, “본래 인연 있는 땅에 땅을 인해 종자와 꽃이 난다. 본래 종자가 없으면 꽃도 나지 못한다”는 게송으로 전법의식을 마쳤다.

2조 혜가 스님 곁에서 2년여를 시봉하며 병도 치유하고 법맥을 받은 승찬 스님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양자강을 건너 안휘성 안경시 잠산현 천주산의 건원선사(乾元禪寺)에 이르러 토굴로 들어가 수행에만 매진했다. 건원선사는 보지(寶志)화상이 양무제에게 청해서 505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이후에 양무제가 사찰 이름을 산곡사(山谷寺)로 지어서 한동안 산곡사로 불렸었다. 그리고 마침내 3조 승찬 스님이 법을 편 후에 삼조사로 바뀌었다.

중국선종사찰순례단은 전날 숭산 소림사와 소실산 이조암을 찾아 긴 여행을 한 끝에 새벽 1시가 넘어서야 하북성 신양시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또다시 새벽 5시부터 승찬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천주산으로 이동했지만 무한을 거쳐 천주산까지 가는 길 역시 쉽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길을 서둘렀으나, 고속도로에서의 차량폭발 사고 여파까지 겹치면서 해질녘이 되어서야 겨우 삼조사에 도착했다.

삼조사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주지 관용 스님을 비롯해 30여명의 대중이 순례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승찬 스님이 법을 펴다가 입적한 도량 삼조사가 있는 천주산은 해발 1485m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한 기후의 영향을 받아 휴양지로 부각되고 있는 곳이다.

선가에서 조사선의 근간이자 요체로 꼽히고 있는 『신심명(信心銘)』을 저술한 승찬 스님의 선기가 서린 삼조사는 계단으로 만들어진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계단이 많다. 삼조선사라는 음각이 선명한 패방을 지나 작은 연못 위로 난 다리를 건너면 넓은 마당이 이어진다. 이 마당 끝에서 시작되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붉은 벽돌의 건물이 객을 맞는다. 건물은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에 반야문이라는 현판이 새겨져 있고, 우측으로는 해탈문, 좌측으로는 정진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반야문 현판 위로 이 사찰의 창건당시 이름이었던 건원선사 편액이 걸려 있다.

수행굴 앞에 해탈법문 이정표

<사진설명>승찬 스님이 법문 후에 서서 합장한 채 입적한 곳에 세워진 입화탑.

반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니 천왕문이 나오고 천왕문을 지나면서 대웅보전을 볼 수 있다. 3조 승찬 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삼조탑까지 참배하겠다는 생각이었기에 날이 어두워지면서 마음도 급해졌다. 대웅전을 나와 삼조탑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가는 길에 2개의 정자가 있다. 먼저 해박정(解縛亭)이 보인다. 해박정은 승찬 스님이 수행에 매진했던 삼조굴 앞의 해박석(解縛石)과 더불어 승찬 스님과 4조 도신(道信) 스님의 문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3조 승찬 스님에 대한 기록은 특별하게 남아 있는 게 없어서 한때 실존인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자료에 남아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도신 스님과의 문답을 통한 가르침이다.

혜가 스님에게 법을 얻은 뒤 수행에 전념하던 승찬 스님이 후일 대중들에게 법을 펼 때, 모임 가운데 겨우 나이 열 넷에 불과한 한 사미가 조사를 찾아와 절을 하고는 물었다.

“스님, 저에게 해탈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누가 그대를 속박했는가?”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으면 그대는 이미 해탈한 사람이다.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사미는 조사의 이 말씀에 크게 깨닫고 조사의 곁에서 9년여를 머물렀다. 잠시 길주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돌아왔을 때 조사는 도신에게 법을 전할 것을 선언하고 “꽃과 종자가 땅에 인하는 것이어서 땅에서 꽃과 종자가 나오기는 하나, 아무도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과 종자가 생길 수 없다”는 게송을 남겼다.

해박석과 해박정은 이렇듯 3조 승찬 스님과 4조 도신 스님의 전법장면을 상징하고 뜻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해박정을 지나 또다시 계단을 오르면 신심정(信心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조사선의 요체로 손꼽히는 『신심명』을 연상하게 하는 이정표다.

지도무난(至道無難·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유혐간택(唯嫌揀擇·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단막증애(但莫憎愛·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통연히 명백하리라)

4언 절구의 146구 584자로 구성된 『신심명』의 첫 구절이다. 선사들은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1700공안의 격외도리 전체가 『신심명』속에 포함돼 있고, 이 첫 구절이 양변을 여읜 중도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밝히는 정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순례단에게 조사 스님들의 행장과 가르침을 설명하던 고우 스님 역시 “이렇게 짧은 글 속에 조사선의 요체를 담아낸 것은 승찬 스님의 일생이 스스로 지혜로서 자성을 회광반조하는 생활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사진설명>삼조 승찬 스님이 수행하고 법을 폈던 삼조사(산곡사) 전경.

신심정을 지나면 승찬 스님이 나무 밑에서 대중설법을 마치고 나서 합장한 채 서서 입적한 장소로 알려진 곳에 입화탑(立化塔)이 있다. 해박정과 신심정, 그리고 입화탑을 차례로 지나면서 신심명을 통해 중도를 가르친 승찬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길을 재촉하자 산곡사라는 현판이 나타났다. 산곡사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나자 너른 마당이 보이고 그 초입에 승찬 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묘탑, 삼조탑이 우뚝 서 있다. 삼조탑 안쪽에는 무엇에나 집착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헤아린 듯, 육조 혜능 스님이 불법과 세속법의 일치를 통해 생활불교와 실천불교를 강조했던 법문인 무상송(無相頌)이 새겨져 있다.

삼조탑 안에는 육조 無相頌이

3조 승찬 스님의 수행력은 물론, 2조 혜가 스님의 가르침과 4조 도신 스님의 선기, 6조 혜능 스님의 법까지 느낄 수 있는 삼조사는 복원불사를 거쳐 지나치게 크지도 않고 초라하다 할 정도로 작지도 않은 모습이다.

신심명을 통해 자신의 할 말을 대신한 3조 승찬 스님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안휘성 천주산=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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