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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혜각존자 신미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나를 내려놓을 때 불법은 절로 드러난다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2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1,893권 888책이라는 방대함과 조선시대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때때로 조선왕조실록은 극도의 편협함에 사로잡히곤 한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세종대왕이 유언을 통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릴 정도로 공경했던 신미(信眉, 1405?~1480?) 스님. 한글창제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훈민정음을 이용해 숱한 책을 발간한 일등공신임에도 스님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인색하기 그지없으며 그나마도 걸핏하면 ‘간승 신미’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뛰어난 어학 능력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불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 스님. 스님은 충북 영동에서 정승까지 지낸 김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가 전에는 수성(守省)이라 불렸고 그의 둘째 동생인 김수온(1409~1481)의 나이를 감안할 때 스님은 1405년 무렵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또 스님의 부도가 속리산 복천암에 세워졌을 때가 1482년이므로 1480년 무렵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님의 동생 수온은 조선전기 대표적인 호불 성리학자였고 그의 동생 수경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어머니는 후일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 스님은 20세를 전후해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갑의 도반 수미 스님과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스님은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만약 신미 스님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전에 학술원의 한 원로학자는 스님의 일생에 대해 ‘그토록 유명한 고승이 법어나 시·글 한편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간 것 같고 속세의 허무가 스님으로 하여금 그 자취를 남기지 않게 한 것이라 여겨진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 스님의 삶을 보면 일부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의상 스님은 법성게를 썼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요. 아마도 의상 스님께서는 ‘설하지 않는 것이 부처의 설함인 것’이라는 경전의 말씀처럼 스스로의 자취를 감출 때 오히려 법이 드러난다고 여기셨을 게요. 하물며 내가 굳이 허명을 드러낼 이유가 어디 있었겠소.”

▷저도 예전에 스님에 대한 글을 써서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지만 만약 저술을 남겼더라면 조선초 간경에 대한 사실이나 훈민정음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도 풀렸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어찌 아쉬움이 남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면 한글이 후세에 전해지기 어려웠고, 경전을 펴내기조차 불가능했을 거요.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남기려는 것과 이름을 가리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해야 옳았었다고 보오.”

▷그렇군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세종대왕과 아주 가까우셨던 모양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스님께서 세종대왕의 요청으로 침실에서 법문을 하시기도 했다고 전해지니까요. 기록에는 스님과 임금께서 처음 만난 시점이 세종 28년(1446) 그러니까 한글이 완성되기 3년 전이라고 나와 있는데 정말 그 때 임금님을 만나셨나요?
“기록이 그러할 뿐 사실은 그렇지 않소. 내 은사이신 행호 스님께서 이미 10여 년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고, 임금께서 동생 수온을 총애한 것도 그보다 훨씬 앞선 1441년이오. 또 세종임금의 아드님이신 광평대군이 나와 친척이 되기도 하다오.”

▷그러니까 한글 창제 훨씬 이전에 세종대왕을 대면을 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많은 부분이 이해될 듯합니다.
“뭐가 말이오?”

▷제가 오랫동안 궁금해 하던 게 있습니다. 흔히 그러하듯 훈민정음은 창제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적극 참여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당시 기록을 보니 훈민정음이 반포된 직후 집현전 학자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면 어떻게 실무담당자인 최만리조차 전혀 몰랐다고 분개할 수 있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유교지상주의 시대에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서적의 65%가 불교문헌이고 반대로 유교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것인지?”

▷지난 500여 년간 한글의 기원이 범어나 티베트어라는 주장이 있어왔지만 최근 국문학계에서는 고려시대 스님들이 경전을 읽을 때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각필 부호와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이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니까 훈민정음 창제에는 고승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그 분이 바로 스님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죠.
“허어 참, 당시 내가 범어와 티베트어에 밝았던 것은 사실이오. 허나 그대의 말처럼 깊이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한 거겠소. 성군이시자 지극한 불자이셨던 세종 임금, 세조 임금의 뜻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 아니겠소.”

▷세종께서는 처음 태종 못지않게 처음엔 불교에 대한 탄압을 강행하셨습니다. 성 밖 스님들이 도성 출입을 못하게 만들었고 불교 종파수를 7개에서 선교 양종으로 줄이기까지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이 불자가 됐나 싶습니다. 시절인연인가요?
“배움이 깊을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아니겠소. 불교는 지난 수천 년간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검증돼 왔고 대중들이 신봉해왔소.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소. 긍정적인 시각으로 그 이유를 바라보려는 순간 불교는 진리로 와 닿습니다. 유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길, 진리의 길을 설파하고 있으니 말이오. 훗날 세종 임금께서는 불교를 숭신한다고 비판을 받을 정도로 신심이 깊으셨으며, 쉬운 글자를 이용해 어려운 불경을 번역하고자 하셨던 뜻도 부처님 말씀을 통해 백성들의 고(苦)를 덜어주기 위한 지극한 애민의 마음이셨소.”

▷얼마 전 베스트셀러가 됐던 『다빈치코드』 『장미의 이름』 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기독교에는 비밀, 기호, 상징 등에 대한 부분이 대단히 발달한 것 같은데 불교에서는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그거야 숨겨야 할 이유가 있거나 모든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있으니까 그렇지 않겠소. 그러나 불교에도 숫자는 대단히 중요하다오. 진리를 깨닫게 하는 숫자, 혹은 진리를 나타내는 숫자를 ‘법수(法數)’라고 하지 않소. 일념, 이공, 이장 삼법인, 삼학, 사성제, 오온, 육신통, 칠각지, 팔식, 구품, 십금강신, 십이연기, 삼십삼천, 108번뇌 등 무수히 많지 않소. 법수를 이해하면 불교의 정수를 이해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오.”

▷그러면 기독교가 상징하는 숫자와 불교가 상징하는 숫자에 큰 차이는 없는 건가요?
“있소. 다른 종교의 숫자나 상징이 특정인들만이 이해하고자 했던 숨김 비밀스러움의 기능이 크다면 반면 불교는 열려 있소. 불교의 숫자는 우리 중생들이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신행의 숫자이고 원력의 숫자이며 깨우침의 숫자라는 말이오.”

▷그렇다면 ‘나랏말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어지가 108자이고, ‘國之語音異乎中國…’으로 시작되는 한문어지가 108의 꼭 절반인 54자인 것도 우연인가요. 또 세종어지가 실린 『월인석보』의 페이지가 108이고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나요?
“허어 참, 그렇게까지~. 실은 훈민정음 창제에 동참했던 우리들의 원력이었소. 한글이 대중화 되어 백성들이 눈을 뜨고 또 이로 인해 불교가 다시 일어나 이 산천이 불국토가 되기를 바랐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었소.”

▷세종께서 유언까지 남기시며 스님께 긴 법호를 내리시려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특히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던 점을 말입니다. 당시 신하들이 이 문구를 빼라고 난리를 쳤던 것처럼 스님께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성왕 세종께서 이 문구를 어찌 넣으려 하셨겠습니까?
“성은이 망극할 뿐이지요. 그러나 어찌 나 혼자만을 위한 호칭이었겠소. 『석보상절』 앞부분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수미, 설준, 홍예, 효운, 지해, 해초, 학열, 학조 스님 등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스님 요즘 불교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특히 고려대장경이 다 한글화가 돼서 흐뭇하시겠습니다.
“그건 그렇소. 누구나 부처님 말씀을 접하게 됐으니까 말이오. 허나 법회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조선시대 같소. 아이들 법회조차 한문식으로 진행되고 천도재 등 전문의식으로 들어가면 한글은 아예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지경이니 말이오. 의식문이 아무리 좋아도 한문만을 고집할 때 귀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오. 불교의 대중화는 불교의식과 언어가 대중을 향할 때 비로소 정착될 것이라는 말이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이숭녕 「신미의 역경사업에 관한 연구」, 「세종의 언어정책사업과 그 은밀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부호자의 문자론적 의의」, 강신항, 「한글창제의 배경과 불교와의 관계」, 김광해 「한글창제와 불교신앙」,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 한글과 산스크리트 문자」, 이재형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 등


찬탄과 공경

“신미는 불경의 번역에 큰 공헌을 했다. 그것은 잘 밝혀지지 않고 있어 오늘날 신미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음에도 그의 처세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세종, 문종, 세조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은 만치 척불숭유의 이조사회에서 불승간(佛僧間)에도 지나친 어용승(御用僧)으로 질시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전체로서 그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가, 시란, 글 한편 없었다는 것은 너무도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간 것 같고 속세의 허무가 신미로 하여금 그 자취를 남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숭녕 전 서울대 명예교수)

“신미가 직접 쓴 친필 진언을 분석해 본 결과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 신미는 승려로서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인도계 문자와 진언에 능통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허일범 진각대 교수)

“(한글창제에 참여한) 그들이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하게 기울인 까닭은 그들이 신(新) 문자를 창제한 목적 중의 하나가 불교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염원이 어지 부분의 글자수를 불교에서 신성한 수로 여기는 108자와 그 절반인 54자, 나아가서는 또다시 그 절반인 27자 등으로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김광해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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