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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6. 윤회②-차창룡의 ‘목탁16-거미’

기자명 법보신문

윤회는 차이의 반복이자 나선형의 순환

“파리는 거미에게 잡아 먹혀 거미가 되고 거미가 된 파리가 소화되어 거미줄로 변한다. 살려고 몸부림을 치던 벌레들은 이것을 깨달은 연후에는 다리가 썩는 줄도 모르고 참선하는 스님처럼 얌전히 거미의 처분을 기다린다.”

<사진설명>인도의 갠지즈 강가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이 노파에게 윤회는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전략…) 거미의 뱃속에는 파리가 열 마리, 모기가 스무 마리, 개미가 서른 마리, 벌이 다섯 마리, 무당벌레도 한 마리……, 그들은 모두 이 컴컴한 지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꿈이어서, 한데 모여 마라톤 회의를 벌인 결과 거미줄이 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가 막힌 묘안을 생각해냈으니, 그리하여 거미줄에는 보이지 않는 파리가 스무 마리, 보이지 않는 모기가 마흔 마리, 보이지 않는 벌이 열 마리, 보이지 않는 무당벌레가 두 마리……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쉬파리가 한 마리 거미줄을 타고 공중곡예를 하니, 거미줄이 춤을 추자 침대에 누워있는 거미의 열 개의 다리 중 천분의 일이 조용히 떨리더라.

참 아름다운 별자리로다, 파리, 모기, 개미, 벌, 무당벌레, 하루살이, 매미, 귀뚜라미……이런 별들의 죽음을 이슬로 말하다보니, 죽음이야말로 오히려 더 별이어서, 죽음을 별로 삼은 살아 있는 으뜸별 거미, 거미의 다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별자리로다, 실똥으로 힘겹게 이어진 그 별자리를 무덤 삼아, 달이라는 곤충이 평안하게 죽어 가는데.

차창룡의 시 「목탁 16-거미」 중 중간 이하 부분이다. 여기 파리 한 마리가 거미에 먹혀죽었다고 해서 그 벌레는 죽은 것인가? 파리는 거미에게 잡아 먹혀 거미가 되고 거미가 된 파리가 소화되어 거미줄로 변한다. 살려고 몸부림을 치던 벌레들은 이것을 깨달은 연후에는 다리가 썩는 줄도 모르고 참선하는 스님처럼 얌전히 거미의 처분을 기다린다.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친다. 거미의 뱃속에 들어간 파리는 거미가 되고 다시 거미줄로 변한다. 연기의 원리에 따라 파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한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거미줄에 밤이슬이 내려 거미줄은 밤이슬을 매단다. 달 밝은 밤이면 이슬은 달빛을 받아 별로 반짝인다. 벌이, 모기가, 파리가 죽어 별이 된 것이다. 달 또한 거미줄에 걸려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별이 된다. 그러자 별이 된 이슬들은 각자가 우주 삼라만상을 담고 있으면서 서로를 비추어준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순간 반사되는 것과 반사하는 것,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지고 화엄 만다라를 이룬다.

시작은 없지만 끝은 있다

거미가 만든 별자리에 다시 달이 걸린다. 달은 거미줄에 걸리는 순간 파리를, 파리가 변해서 된 거미줄과 거미줄에 맺힌 이슬들을 별로 빛나게 하며 자신은 곤충 신세가 된다. 곤충이 별이고 달이 곤충이다. 곤충은 달빛을 받아 허공에서 반짝이니 별이요, 달은 거미줄에 걸려 빛을 잃어가니 영락없이 곤충이다.

이처럼 윤회란 우주 삼라만상이 거대한 우주 공간 속에서 연기와 업의 원리에 따라 시작도 없던 때로부터 단 한순간도 끊임이 없이 돌고 도는 반복이다. 영겁의 순환이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간다. 내가 바람이 되고 돌이 된다는 말은 시간만 넓히면 진실이다. 정말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때 한 알의 씨앗이 폭발하여[Big Bang] 우주에 수많은 성간물질을 퍼트리고 그것이 하나로 뭉쳐지면서 별을 만들고 그 별이 수천 억 개 모여 은하계를 이루고 그 은하계가 또 다시 수천 억 개 모여 대우주를 형성하였다. 은하계의 수천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계에 지구와 화성이 만들어지고 지구엔 거기에 존재하던 몇몇 물질이 합성하여 생명체를 이루고 이들 생명체가 진화하여 사람을 만들었다. 인류의 역사를 250만년으로 잡더라도 10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하면 우리는 1년 중 가장 마지막 날의 11시 59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시간을 살다가 사람은 죽어 흙이 되고 그 어느 날엔가 지구가 폭발하여 다시 성간물질로 돌아가면 그것이 우주에 흩어져 떠돌다가 다시 뭉쳐져서 새로운 별을 낳는다. 그리고 수천억 년이 지나서 우주는 다시 대수축을 하여 한 알의 씨앗으로 뭉쳐지고 이 씨앗은 다시 대폭발을 할 것이다.

별에서 나서 별로 돌아가는데 그리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리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이름을 높이려, 더 짜릿한 쾌락을 위하여, 육신을 허비하고 남을 해하기까지 하여야 하는가? 금고 속에 가득한 돈도, 높이 높이 솟은 자리도, 이름이 빛나는 신문도, 향락의 찌꺼기가 흩어진 침대 시트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나의 심장과 뇌도, 나의 팔다리와 생식기도 모두 하나같이 별로 돌아간다.

우주의 먼지로 이루어져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데 “나”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란 무엇인가? 너의 이름도, 너의 지식도, 너의 지위도, 너의 삶과 경험도 네가 아닐진대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다들 먼지로 돌아가는데 특별히 중요한 자는 누구이며 귀중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한의 시간과 무망한 우주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행성에서 같은 삶을 보내는 너와 내가, 내 앞에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이 오직 소중한 것이 아닌가? 영겁의 순환 중 찰나의 삶을 함께 해 준 그들이 은혜로운 것은 아닌가?

그대, 삶이 그토록 버겁고 고단하거든, 지치고 지쳐 이제 돌아와 쉬고 싶거든, 두들겨 맞고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어 밤거리를 배회할 때 머리를 들어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언젠가 별이 될 나를, 함께 별로 돌아갈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들뢰즈(Gilles Deleuze)는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 넣는 것이 시간이라는 통찰을 하였다. “반복은 반성의 개념이기 이전에 행위의 조건이다. … 역사적 반복은 역사가들의 반성적 유비나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행위 자체의 조건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5.16 쿠데타가 10.26 쿠데타로 반복된 것은 역사가가 양자 사이를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여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시간-인과의 관계 해석 ‘연기’

전두환을 비롯한 10.26의 주역들이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사회적 조건 사이에서 정권을 잡기 위하여 5.16을 재현하여 반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생존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실은 재현이 되먹임(feedback)하는 장이다. 농부들은 작년, 또는 그 전에 농사를 지었던 일을 재현하면서 오늘 씨를 뿌리고 모를 내고 거둔다. 지금 행해지는 결혼식, 시험, 장례식, 선거, 전쟁 등의 사건 또한 과거의 사건과 의례에 대한 재현을 통해 기획되고 실천된다. 과거의 현실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의 재현이 없이 현실은 없다. 그리 삶이 재현이고 반복이지만, 그것은 똑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시간, 시간과 엮어있는 인과관계다.

불교의 연기론도 초기 불전을 정확히 읽으면 시간과 엮어진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에 논증적 해석이 보태지면서 공간, 대상과 대상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삶과 역사는 재현이고 반복이지만 시간에 엮어진 인과관계에 따라 차이가 형성된다. 더 시간을 넓혀서 삶과 죽음 이후의 세계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은 업에 따라 사람도 되고 개도 되는 것처럼, 윤회는 영겁의 반복이되 시간, 시간과 엮어진 인과관계에 따라 차이를 만드는 반복이다. 윤회는 또 의미 없는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나선형의 순환이다. 연기론에 따라 차이를 만들고 이타행을 통하여 진보를 이루는 삶이, 그리하여 영겁의 순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대승의 길이다. 하지만 윤회는 시작은 없어도 끝이 있는 순환.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팔정도(八正道)를 굳게 실천하여 해탈을 이루는 순간 우리는 윤회라는 영겁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윤회가 곧 열반이다. 한마디로 말해, 윤회란 시간과 연기에 따라 차이를 만드는 반복이자 시작은 없어도 끝이 있는 나선형의 순환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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