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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7. 업①-충담사의 ‘찬기파랑가’

기자명 법보신문

무상히 가버린 ‘목숨 긴 화랑
그리워 부르는 눈물어린 노래

“장애에 굴하지 않는 잣나무처럼 절의를 지켰던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과 지절의 정신을 환기함과 아울러 자신도 그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비전을 품겠다는 노래”

<사진설명>기파랑은 경주 남산 너머로 보이는 저 옛 신라의 들판을 누비던 화랑이었다.

지금 세상은 타락의 극에 달한 느낌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보면 수십, 수백 억 원의 뇌물을 먹은 것이 드러났는데도 반성의 빛이 전혀 없다. 예전엔 불륜 행위를 하다가 걸리면 본부인에게 끽 소리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맞는 것이 당연한 풍속도였지만, 이제는 본부인보다 더 당당한 자들이, 외려 본부인에게 이혼하라고 협박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닌 모양이다. 돈 몇 만원에,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사람을 여럿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다.

“서울 강남에 사는 한 주부가 세탁기를 고치러 온 AS직원에게 짜증을 냈다. 그 다음 날 밤 미국 L.A.에 사는 한 백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왜? 그는 AS직원의 동료 직원의 아내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또 친구의 남편이었다.”

우리의 행위 뒤에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과관계에 따라 철저히 작용을 하는, 무시무시한 업. 그 업을 안다면 그들이 악업을 그리 쌓지는 못하리라. 타락의 한 가운데서 저 멀리 신라 땅으로 가 향내 나는 사람 기파랑을 만나보리라.

울어리치매/이슬 밝힌 달이/흰구름 따라 떠간 것이 아닌가/새 파란 물 서리에/기파랑 모습이올시 수풀이여//일오내 자갈벼랑에서/낭이여 지니게 되오신/마음의 언저리를 따르고져//아. 아! 잣나무 가지 높아/눈이라도 머물지 못할 꽃한(花判)이여//

고매한 인품지닌 기파화랑

위 노래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 대 월명사와 더불어 최고의 향가 작가인 충담사의 노래, ‘찬기파랑가’이다. 충담사가 기파랑을 몹시 그리워하다 결국 울기까지 한 모양이다. 울다 보니 풀잎에 영롱하게 맺힌 이슬을 비추던 보름달이 흰 구름을 따라 떠가버렸다. ‘억새가 파랗다’고 노래한 것은 달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리’는 ‘사이, 가운데’를 뜻하는 옛말이다. “새 파란 물 서리에”란 “달빛을 받아 푸른 빛을 한 억새가 늘어선 물가에”라는 의미다. “기파랑 모습이올시 수풀이여”에서 앞에 ‘억새’란 것이 나오고 “무엇이라고 착각한 것이 무엇이다.”의 구조이므로 ‘수풀’은 지시적 의미로 한정된다. “기파랑의 모습이라고 여긴 것이 알고 보니 억새 수풀이었다.”는 말이다.

초구(1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간 순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충담사는 억새가 우거진 물가에 서 있는데 달이 떠서 억새밭을 비추어 푸르스름하게 보이게 하고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을 반짝거리게 한다. 곧 그 사이로 달이 비집고 들어와 달은 얼굴이 되고 갈대 잎 수풀은 몸의 형상을 이루며, 달빛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슬은 그에 걸친 빛나는 옷을 이룬다. 충담사는 이 형상이 마치 기파랑과 같아 그를 떠올리고 허기진 그리움에 눈물을 짓는다. 한참을 울고한 후에 다시 고개를 드니 달은 억새 숲 위로 떠올라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뒤다. “흰 구름 따라 떠간 것이 아닌가.”라고 영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이슬도, 달도 사라진 억새 숲은 단순한 수풀로 돌아오는 것이다. 충담사는 자연의 형상마저 사라져버린 허망함을 “기파랑 모습이라고 여긴 것이 수풀이었구나.”라고 표출시킨다.

이것을 시간의 차례대로 노래했으면 ‘찬기파랑가’의 초구(1연)는 일종의 설명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고도의 시적 기교를 갖춘 충담사는 자연의 형상에서 죽은 자를 떠올리고 그것마저 곧 사라지자 사무치는 그리움과 인생의 무상함, 자연의 형상마저 사라져버린 허망함을 ‘울어리치매’라는 한 마디에 응축하여 토해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또 이것을 다음의 사건과 연결시킨다. “울어리치니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것이 아닌가.”라고 한 진술 속에는 두 구가 인과관계를 이루므로 시적화자인 자신이 울었기 때문에 달이 사라져버렸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울어버린 것은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생각하면 그것은 고인에 대한 예가 아닐 뿐더러 남아있는 자의 올바른 삶의 자세 또한 아니다. 초구로서 상념을 끝내고 승구(2연)에서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오내 자갈 벼랑에서/낭이여 지니게 되오신”에서 ‘일오내’는 고유명사이다. ‘일오’라는 이름의 냇물을 가리킨다. 이는 기파랑이 일오내의 자갈벼랑에서 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구체적 사건임을 의미한다. 다만 기파랑과 충담사가 모두 화랑이었고 강이나 내 또한 화랑이 풍류를 즐기고 수련을 쌓던 곳이니 그런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뒤에서 ‘꽃한(花判)’이라 했는데 ‘꽃(花)’은 ‘화랑’, ‘判(한, 칸)’은 ‘우두머리’를 말하니 ‘화랑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충담사는 이를 올곧은 잣나무에 비유하고 그 마음의 언저리라도 따르고자 했다. 그러니 기파랑은 강인한 의지와 올곧은 절의, 고매한 인품을 갖춘 화랑의 표상이다.

기파랑은 어떤 날 일오내란 곳에서 나중에 충담사가 이리 간곡한 어조로 찬모할 정도로 곧은 절의, 고매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한 것이다. 이것이 “일오내 벼랑에서 낭이여 지니게 되오신”이다. 충담사는 그 일을 떠올리며 다시금 기파랑의 고매한 인품과 절의를 되새긴다. 잣나무보다도 높고 푸른 인격과 기품을 가진 이에게 어딘 근접하랴. 기파랑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의 마음은 그 분의 한 쪽 귀퉁이라도 따르겠다는 의지표현으로 표출된다. 그러니 결구(3연)에서는 그에 대한 찬모를 응축함과 아울러 그 찬모 속에서 기파랑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분열을 해소하고자 한다. ‘아, 아!’는 이에 대한 영탄이다.
서정성을 최고로 고조시키는 동시에 모든 분열과 대립을 화해로 종합하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차사(嗟辭)다.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라도 머물지 못할 꽃한이여”란, “잣나무 가지처럼 절의나 의지가 곧고 푸르고 또 높아 어떤 장애라도 그를 덮을 수 없는 화랑의 우두머리여”의 뜻이다.

이렇듯 ‘찬기파랑가’는 “억새수풀에 어린 이슬이 달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기파랑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를 그리워하나 슬픔에 머물지 않고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는 잣나무처럼 절의를 지켰던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과 지절의 정신을 환기함과 아울러 자신도 그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비전을 품겠다는 노래”이다. 무상의 슬픔, 한 인물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올곧은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유사인물 등장

이렇게 보면 위 노래는 기파랑을 그리는 서정가요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불경과 관련시켜 읽으면 업의 원리가 담겨 있다.

어찌 이 노래가 업과 연관이 되며, 과연 기파는 누구인가. 한자도 똑같은 ‘기파(耆婆)’가 불경에 나온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사문과경(沙門果經)」에 의하면, ‘기파’라는 말은 ‘목숨이 길다’라는 뜻을 가진 인물이다. 이름만이 아니다, 본질과 기능, 곧 두 인물의 성격과 행적이 유사하다. 중인도 마가다 왕국의 아자세(阿阿世王)왕의 사생아인 기파와 신라의 기파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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