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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창립과 활동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계 최초 여성단체…계몽운동에 주력

1920년대 여학교 졸업생·일본유학파가 중심이 돼 결성
초기부터 운영난…사찰 여성신도와 공감대 형성에 실패
능인여성학원·명성실업학원 등 운영…일제탄압에 쇠퇴

<사진설명>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서 운영했던 능인여자학원의 직원과 학생들.(민족사 제공)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개화기를 맞이하여 서구의 남녀 평등사상이 들어오면서 여성들의 의식이 깨이면서부터였다. 근대 교육기관에서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다.

신여성이란 일반적으로 근대 교육을 받아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단발머리에 구두를 신고 봉건적인 강제 혼인과 축첩제를 비판하고,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주장하면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던 여성들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외국 유학을 한 사람들은 주로 의사·기자·화가·음악가·교사 등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불교계에도 여성단체가 생겨나 여성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22년 4월에 우봉운·김일엽·김광호·김난득·박성옥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의 교양 함양과 지식계발 그리고 불교 교육을 위해서 창립되었다. 현재 여자청년회의 그 조직과 규모를 정확히는 알 수 없는 형편이다. 1925년경에 약 1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요 구성원들 가운데는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경성에서 여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또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여성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다. 초대 회장은 우봉운이 피선되었는데 그녀는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계성학교와 간도의 여학교 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4년경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최초의 여성단체로써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을 함께 할 여성을 양성한다는 강령을 채택하였고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부인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북풍회에서 활약하였는데 북풍회는 당시 서울청년회·화요회 등과 더불어 영향력이 강한 사회주의 단체이다.

신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비구니와 여성신도들과는 교감을 가지지 못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구성원들은 종래의 여성 불교 신도들이 종교 활동에 있어 단순한 신앙생활에 젖어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한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공덕 쌓기에 급급하여 불상이나 탑·종을 만든다든지 재를 올리거나 가사(袈裟) 등을 만드는 불사에 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 본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고 미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반성하고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하면서 출범하였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한 신여성들과 전통 불교의 그늘에 있었던 여성신도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교계 여성들의 의식 계몽과 교육을 위해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능인여자학원(能仁女子學院)을 운영하였다. 이 학원은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1923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교장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회장이었던 우봉운이 맡고 있었다. 4년제의 학교였으며 학생은 200여명 정도였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사회참여는 조선불교청년회와 함께 1923년 3월 24일부터 1주일간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인 서울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개최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하면서 전개된다. 이 청년당 대회는 서울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90여 단체가 참가하였다. 당시 그 대회에서는 일제하 민중해방운동의 주체를 자임한 청년단체들이 교육문제, 경제문제, 민족관계, 부인문제, 노동문제 등 각 청년 단체의 존립 및 발전, 기타 사회문제에 대한 주제 등을 토의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모임이었다. 조선불교여자 청년회가 주체 단체로 참여하게 된 것은 그 대회의 토의 주제 속에 종교문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서는 우봉운, 김광호, 이명규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전조선청년당대회의 제1분과위원회에서는 격렬한 논쟁 후에 종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남에 따라서 이후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서는 급진적인 청년당의 노선에는 합류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기득권층인 주지 계층의 압박과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1925년 이후부터는 활동이 침체된다. 이 무렵 능인여자학원의 경영권이 일본 사찰인 서본원사(西本願寺) 경성별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능인여자학원이 운영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평의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이 사안은 동의를 얻지 못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침체기로 접어들자 구성원들은 근우회와 조선여성동우회 등 일반사회 단체 여성운동 단체에서 활약을 계속한다. 1927년 신간회의 방계 단체로 근우회가 조직되자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소속 회원들 가운데 우봉운·김일엽 등 많은 사람들이 근우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주의 계열에 소속되었든, 또는 개량적인 민족운동이었든 비록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활동은 침체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사회적인 활동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었다.

<사진설명>조선불교여자청년회 구성원이었던 김일엽의 출가 이전 모습.

이 같은 사회단체의 활동 경험은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재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29년 재기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해 4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설립한 대자유치원의 교사 10명이 조선불교여자청년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모였다. 10월 19일에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임원 선출과 규약 등이 통과되었다. 당시 대자유치원의 원장은 김태흡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불교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불교여자청년회가 재기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재기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불교 일요학교를 운영하였고, 부인강좌와 재봉학원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불교를 통한 여성의 지식계발을 지향하는 여자청년회의 목적에 부응하는 사업이었다. 이 시기의 활동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재봉학원의 후신으로 1931년 명성여자실업학원을 운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여자실업학원은 불교청년회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지원과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서 운영하였다. 이 학원의 목적은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쳐서 사회에 공헌할 인격을 양성함에 있었으며, 모집정원은 각 과에 200명이며, 설치된 학과는 본과는 2년, 연구과는 1년, 별과 1년, 전수과(專修科) 6개월 과정의 도합 4개과였다. 그리고 직업과목으로는 양복·자수·편물·세탁·염색·할팽(割烹:요리) 등의 과목이 있었으며 이외에 보통학과도 가르치고 있었다.

1929년에 재기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변화하면서 그 산하의 조선불교청년여자동맹으로 전환된다. 아울러 김일엽·박순덕·김광호 등도 책임위원으로 피선된다. 1931년 가을 불교청년여자동맹은 명성여자실업학원의 경영난으로 비불교계 인사가 이 학원을 인수하겠다는 사실에 대해 양여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내리고, 31본사에 재정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 사안은 종회에 회부되었으나 부결되었지만 종회원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31본산에 동정을 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그다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0년대 불교계 여성들의 의식계몽과 교육을 위해서 창립되었던 조선불교여자청년회는 설립 초기부터 운영상에 어려움을 겪다가 1925년경부터 쇠퇴하게 된다. 이후 구성원들은 근우회와 조선여성동우와 같은 사회단체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경에 다시 재기하여 명성여자실업학원을 설립하여 여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1931년 6월경에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조선불교청년여자동맹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기존의 청년 조직을 활성화 하려는 목적에서 분산적 불교청년회에서 불교청년총동맹으로의 전환이라는 슬로간 아래 진행된 결과였다. 그러나 조선불교청년여자총동맹은 1935년 일제의 탄압에 노골적으로 강화되는 시점에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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