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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8.업② 경덕왕과 세조의 업

기자명 법보신문

권좌 탐한 경덕왕 “기파랑가 뜻 깊구나” 탄식

<사진설명>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세조는 온 몸에 생겨난 종기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다. 그 역시 죄업을 씻고자 불사에 매달렸으며 오대산 상원사는 그런 세조의 후원으로 중창됐다.

『장아함경』 「사문과경」 편을 보면 아자세왕 설화가 나온다. 중인도 마다가국의 빈비사라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하며 신에게 기원하였는데, 어떤 관상가가 와서 말하기를 “비부루산에 있는 선인이 죽으면 태자가 탄생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빈비사라왕이 그때를 참지 못하고 선인을 죽이니, 곧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였다. 선인의 원한이 깃들어서인가. 장성한 태자는 새 교단을 조직하려는 야심을 품은 제바닷타의 꾐에 넘어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왕을 죽이고 어머니를 가두는 패륜을 범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아자세왕이다.

살해당한 선인 태자로 환생

아자세왕은 창녀인 바리밧데와 관계하여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길가에 버려졌는데도 살아남아 “목숨이 길다”라는 뜻으로 ‘기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더니 마침내 왕의 시의(侍醫)가 된다. 아자세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빈비사라왕을 죽인 죄책감으로 온 몸에 종기가 난다. 기파는 마음으로 생긴 병은 절대로 낫지 않는다며 그를 세존께 인도하여 불문에 귀의하도록 한다. 아자세왕은 기파의 인도에 따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참회를 하여 교단의 외호자(外護者)가 된다. 그는 불전 제1결집의 산파 역할을 맡는다. 이에 부처님은 그를 용서하고 “아자세왕은 이제 스스로 참회하여 죄를 감함으로써 무거운 재앙에서 빠져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경덕왕도 마찬가지이다. 이 노래가 실린 삼국유사의 표훈대덕 조와 ‘찬기파랑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주류였으나 『아함경』의 이 대목을 떠올리면 누구나 이것이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경덕왕은 신라 역대 왕 가운데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데 가장 매진한 왕이다. 이를 위하여 화엄 철학을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삼고, 신라의 지명에서부터 나라의 각종 제도를 중국화하였다. 요즘의 독재자들도 그렇듯, 그는 권력을 세습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경덕왕은 옥경이 너무 커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경덕왕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새 부인인 만월부인을 얻는 한편, 표훈대사를 불러 하늘의 도움을 청한다. 계속 거부하는 데도 고집하자 천제는 “만일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라고 말한다. 이에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사내를 얻으면 족하다” 하였다. 그리고서 낳은 이가 건운, 곧 혜공왕이다.

경덕왕은 신하들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모로 어리석고 모자람이 많은 그를 태자로 앉히려 하였다. 당연히 김염상을 비롯한 귀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난다. 『삼국유사』는 이를 “두 해가 출현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그 혼란상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표현하였을까? 혜공왕이 즉위하자, 신라는 이때부터 국운이 기울어 망국을 향해 달려갔다.

빈비사라왕 ‘외호자’ 자처

변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왕과 귀족이 서로를 죽였으며 표훈대사와 같은 성인이 다시 나지 않았다. 결국 혜공왕은 일개 사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선덕왕(宣德王) 김양상(金良相)이 백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당시 맥락으로 돌아가자. 『아함경』이 널리 읽혔으니, 아자세왕 설화는 지금의 ‘토끼와 거북이’처럼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경덕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아들을 억지로 얻어 나라가 혼란을 맞은 것까지는 아자세왕 설화와 거의 같다. 그런 혼란 속에서 경덕왕은 당연히 불안한 미래, 곧 아자세왕 설화와 같은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아자세왕 설화 속에 있다. 그것은 아자세왕처럼 경덕왕도 기파와 같은 구원자를 만나 자신의 죄업을 씻고 불법의 외호자가 되는 길이다. 실제로 경덕왕은 건운을 낳은 왕12(753)년 이후 불법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왕 13년에는 지금의 봉덕사종(에밀레종)의 두 배에 달하여 중량 49만근이 넘는 황룡사 대종을 주조하고, 그 이듬해에는 중량 30만여 근에 달하는 분황사 약사동상을 주조하며, 다시 황동 22만근을 투여하여 봉덕사종을 주조하나 완성은 보지 못한다. 왕23년에는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개조하는 경비로 벼 2만 3천 7백석이나 소요하며, 찬란한 문화유산인 불국사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조영하였다.

어디 불심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제 왕권강화에 골몰한 경덕왕의 행적이나 건운을 낳은 직후인 왕10년경에서 20여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삼보(三寶)를 외호한 일을 한 것은 심상치 않다. 전제 군주 경덕왕이 불법을 수호한 진짜 이유는 죄업을 씻어 아들의 세습으로 인한 혼란을 불법의 힘으로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찬기파랑가’는 경덕왕과 관계없이 충담사가 고매한 화랑인 기파랑을 찬모하여 부른 노래다. 하지만, 경덕왕은 다른 의도로 이 노래를 수용하였다. 그는 자신처럼 태자를 고집하다 죽임을 당한 빈비사라왕의 운명을 답습하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향가의 작자인 충담사 앞에서 “그 노래의 뜻이 깊다”라고 평한 것이다.

역사 또한 나선형으로 순환한다 했는가? 오대산의 능선과 하늘과 냇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앉음새가 가장 좋았던 절집, 상원사. 그 입구에 춘양목이 그 곧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사이로 눈이 시리게 맑은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이 우당탕 돌아 소를 이루는 곳에 세조의 목욕 터가 있다. 세조는 어린 단종을 죽이고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왕이다. 그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벌로 온 몸에 종기가 났다. 그 또한 죄를 비는 마음으로 불법의 외호자가 되어 수많은 절을 짓고 불경을 비롯하여 「석보상절」 등 불교서적을 펴내게 하였다. 그는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쌀 5백석을 강릉부로 가져오고 공사비로 비단 1천 필을 충당하여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세조가 상원사로 가던 중 이곳에서 목욕을 하였다. 종기로 가득한 몸을 신하에게 보이기 싫어 홀로 물을 끼얹고 있었는데, 등이 몹시 가렵던 참에 주위를 둘러보니 한 동자가 숲 속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는 때를 말끔히 밀고는 수정 같은 오대산 맑은 물을 한 아름 떠서 등에 뿌렸다. 세조는 “얘, 아가! 등을 밀어준 것은 참으로 고맙다만 너 어디 가서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고 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동자는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하지 마시게”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가 그때서야 깨닫고 자기 몸을 돌아보니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종기가 싹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그 문수보살은 지금도 천진한 동자의 모습을 하고 상원사에서 그 냇물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국보 221호인 그 보살상의 뱃속에서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의 발원문과 중수발원문, 법화경, 화엄경, 사리, 명주 등 유물 23점이 1984년에 쏟아져 나왔으니 어찌 이를 설화라고만 할 것인가?

연기-윤회-업 셋이며 하나

이처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마음으로(意業), 말로(語漁), 몸으로(業) 짓는 것으로 말미암아 힘을 가지고 작용하는 것을 업(業, karma)이라 한다. 업의 사슬은 우리의 삶에 깊이 감겨있다. 때로는 모습을 알려 우리에게 삶의 빛을 제시하지만, 때로는 숨어서 그 위력을 철저히 보여준다. 세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조건이 되고 원인이 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으며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된다. 그러니 악업을 소멸하지 못하면 우리는 육도(六道)를 유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리를 무시하고 악업을 쌓는다면, 나는 이승에서 무슨 벌을 받으며 다음 생에 무슨 존재로 태어나 육도에서 고통의 절규를 지르겠는가? 연기와 윤회와 업은 셋이면서 하나이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더 이상 악업을 지을 수 없으리라. 설령 지금 부귀영화와 지극한 향락을 누릴지라도 그것이 타인을 해하고 악업을 쌓는 길이라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악업을 계속 쌓느냐, 선업을 쌓아 복을 받느냐, 아니면 팔정도를 실천하여 이를 멸하고 해탈의 길로 가느냐? 당신은 그 세 길 가운데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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