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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조선이여, 맙소사

기자명 법보신문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짧은 일정의 외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입국신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손에 들린 여권을 펼쳐보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21세기의 한국 사람은 누구라도 여권 하나만 지니면 떳떳하게 외국을 돌아다닐 수 있고 보호를 받습니다만 수십 년 전에는 왜 이러지 못했을까요?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백성들. 군대 갔다 오면 면서기를 시켜주겠다고 회유해도 꿈쩍하지 않자 말을 듣지 않으면 만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협박을 받고서 결국 조선의 부모들은 자식을 전쟁터로 ‘지원’케 하고 맙니다.

“총알 피해 댕겨라.”-아버지

“호랑이한테 물려가더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믄 된다. 그저 관세음보살만 염혀. 그럼 살아난다.”-어머니

청년 신길만이 만주의 전쟁터로 차출될 때 그의 생환을 보장해줄 부적은 부모의 저 당부뿐이었습니다. 그는 착한 아이처럼 쏟아 부어지는 총알을 이리저리 잘 피해 댕겼고, 모진 추위 속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설화가 곱기만 한 오세암의 동자스님을 떠올렸습니다. 아, 그러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일본은 조선의 적인가, 아닌가?” “일본이 소련의 적인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소련이 일본을 무찌르면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조선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소련에 힘을 합쳐야 되겠는가, 아닌가?”

이 네 개의 질문으로 간단히 소련군복을 입게 되고, 다시 빤한 선택의 기로에서 독일군복을 입게 됩니다.

“지금 당장 소원이 뭐지?” “그럼 시키는 일은 뭐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독일군으로 근무하라.” “우리 독일은 스탈린에게 고통 받는 너희 같은 모든 소수 민족들을 독립시키고 구해줄 것이다. 그러니 충성을 다할 수 있겠지?”

아무도 조언을 해 줄 수 없었던 시절. 그저 눈치껏 내린 선택이 최소한 고향과 더 멀어지는 길은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이 그들의 불안을 보듬어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노르망디 해변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그들은 혈서를 쓰면서까지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알렸으나 끝내 소련이라는 국적을 벗지 못하고 강제송환당합니다.

스탈린이 전쟁 책임을 살아 돌아오는 전쟁포로들에게 떠넘기지만 않았더라면 주인공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라도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미련스레 희망을 품어봅니다. 학살당한 5백만 명의 ‘숫자’ 속에라도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나마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역사는 몇 몇 인물의 이름으로만 거창하게 기록될 뿐이나 미국 문서기록소에서 찾아낸 한 장의 사진, 그 속에 담겨 있는 겁에 질린 노란 얼굴빛의 조선인은 그 거창한 역사의 기록이란 것이 얼마나 황당한 아이러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KAL기를 타고 돌아와서 여권에 입국도장이 찍히는 것을 확인하자니 ‘예전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어쩌자고 남의 전쟁의 광풍에 휩쓸리고 말았는가’ 하는 생각에 자꾸만 어이없어져 그저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라고 탄식만 하고 말았습니다.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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