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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10.시간②-용장골 마애불상

기자명 법보신문

‘무한’이 ‘찰나’에 들때 돌부처가 춤 춘다

<사진설명>용장골 마애불은 평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옛 신라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정토까지 이어지는 곡선의 시간이 어우러져 있다.

시간은 우리의 삶에 깊이 스미어 있다.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이 통째로 변할 정도로.

허기진 그리움에 떨다/용장골 부처 앞에 서면/바위 속 부처는/달빛과 어울려/춤을 추다가/또 춤을 추다가/빛 되어 정토로 오르고//달도 멈추는 그 찰나/九世가 하나.

필자가 지은 ‘시간’이라는 시다. 경주 남산 용장골 마애불상은 원융미(圓融美)와 질박함이 어우러진 불상이다. 질박하면 미천하고 원융미가 빼어나면 온화함과 평안함을 잃기 마련인데, 이 불상은 거룩하면서도 소탈하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그시 감은 눈과 수려하게 흘러내린 코, 미소 짓는 듯 아닌 듯한 입술, 이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귀와 원만한 얼굴. 화강암 돌이 스치고 지나간 자취대로 새겨 화강암의 결과 철분이 함유된 층의 붉은 띠가 그대로 부처님의 턱과 몸에 얼룩무늬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 질박하기 때문일까? 정녕 돌에 새긴 것인데 어머니처럼 상대방을 온화하고 평안하게 한다. 어깨와 가슴은 적당히 넓어 위엄이 있으면서도 둥그렇게 온화하고, 가사와 승기지의 선은 수직으로, 대각선으로 경쾌하게 흘러내리면서 수직의 장엄함을 대각선의 평안함이 받쳐주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룩하고도 소탈한 마애불

두광과 신광은 겹으로 두텁게 새겨져 입체감이 있으면서도 전체 불상을 균형감 있게 받치고 있고, 겹으로 새겨진 연좌대는 적당히 V자 모양으로 휘어져 역동적이면서도 전체 불상을 안정감 있게 받치고 있다. 항마촉지인을 한 손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서도 날렵하여 맵시가 있고, 연좌대 아래 구름은 불상을 두리둥실 떠오르게 한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코, 손가락 등 부분들은 전체와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전체는 부분들을 압도하지도, 주눅이 들게 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저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저것은 이것의 미를 더욱 향상시킨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 예술의 진미는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조차 작품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데 있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이 불상은 동영상으로 변한다. 이때 저것은 돌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있는 부처를 드러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교교한 달빛 따라 입술은 가지가지 형상의 미소를 자아내고, 두광과 신광을 타고 오르다 가사의 선 따라 미끄러져서 구름에 이른 빛은 불상을 출렁이게 한다. 그 순간 바위 속에 숨었던 부처가 뛰쳐나와 달빛을 이루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춤을 추다가 무아경에 이르는 찰나, 부처와 보는 이는 정토에 이른다. 정토에서 잠시 부처로 머물다가 중생을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내려와 사람이 되고 돌부처가 된다.

“무량겁이 곧 한 생각”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 부처가 눈에 밟혀 허기진 그리움에 떨다가 열차를 타고 그 부처 앞에 섰다. 다시 무아경에 이르면 지나던 달도 멈추고 시간도 정지한다. 그 순간 구세는 하나가 된다.

의상 대사는 『화엄일승법계도』에서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어라./구세(九世), 십세(十世)가 상즉(相卽)하여 어지러이 뒤섞이는 일 없이 따로 떨어져 이루었어라.”라고 말한다.

구세라는 것은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를 말한다. 필자가 지금 용장골 부처 앞에 있는 그 순간은 인연에 따라 구세가 한 순간에 겹쳐진 때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이 남산에 부처가 상주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신라 시대 어느 날 그 부처가 돌로 화한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중생들이 돌을 통해 부처를 만나 해탈을 이루는 어느 날이다. 현재의 과거는 내가 부처 앞에서 신라인의 불심을 헤아리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부처 앞에서 무아경에 이르는 이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오늘 부처를 만남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로는 부처가 남산에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불상 앞에서 다시 무아경에 이르는 바로 그 찰나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를 부처님의 진리가 인연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十世)이다.

이처럼 한 순간의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잠깐 신라인의 불심을 떠올리고 그를 반추하듯 찰나의 순간에도 무한한 시간이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내일 이 장소에 다시 부처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차이를 갖는다. 들뢰즈의 말대로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 넣는 것이 시간이다.” 차이를 갖지만 부처를 통해 깨닫는 진리로 인하여 하나로 통한다. 구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도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며, 구세, 십세가 서로 서로 부합하되 아무런 뒤섞임 없이 떨어져 따로 이루진 것이다.

서양, 또는 현대의 시간은 직선이다. 과거가 흘러 현재가 되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이어진다. 인간은 태어나서 유년기를 거쳐 청장년에 이르고 노인이 되어 삶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직선의 시간에서 탄생이 시작이라면 죽음은 마지막이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삶의 환희에 푹 빠져있는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과 권세와 향락과 행복의 종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직선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삶을 초조하게 소비한다. 삶을 불태우면서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점유하게 되고 타인의 욕망을 점유하자면 타인과 갈등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곡선의 시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자 거듭남이다. 낙엽이 되어 나뭇잎이 사라진다 해서 나무를 죽었다 하는가? 계절이 지나 봄이 되면 그 자리에 새싹이 나지 않는가?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와서 소풍 온 듯 삶을 살다가 다시 극락이든 천국이든 타계로 돌아간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그것은 공포나 불안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곡선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조용히 죽음을 대비하며 삶을 의미로 채우려 한다. 삶을 의미로 채우려 하기에 욕망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채우려한다. 내면을 채우려는 이들에게 적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곡선의 시간엔 끝 없어

죽음이 끝이라는 이들은 내일 종말이 온다면 약탈과 겁탈, 학살을 일삼는다. 하지만 그 반대의 시간관을 가진 이들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이들이다. 선한 사람도 직선의 시간을 살면 초조하게 삶을 소비하게 된다. 반면에 악하게 살던 사람도 시간이 순환하는 것이란 것을 알면,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면 부처가 된다.

『금강경』 「능정업장분」에서 석가모니는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는 전생에서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인과관계로 움직인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태어난 것이며, 씨가 땅에 떨어져 썩는 인이 있었기에 저리도 아름다운 꽃이 나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인과관계를 낳는 우주의 궁극적인 결합력이 바로 업(業)이다. 현생만을 보면, 짧고 직선적인 시간관만으로 보면, 선한 일을 하면 손해 보는 부조리로 만연한 곳이 세상이다. 그러나 전생까지 포함하여 윤회의 둥그런 시간관으로 보면, 선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전생의 죄업을 씻는 과정이다. 선한 자는 현생의 선업으로 전생의 죄업을 모두 씻어내고 후생에서는 복을 받는다. 곧 선한 자가 고통을 받는 것은 전생에서 죄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 원인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며 지금의 고통은 고통이라기보다 선업을 쌓는 과정이요, 다시 이 선업이 원인이 되어 나의 후생은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곡선의 긴 시간관으로 보면 세상은 언제나 정의롭다. 착한 자가 고통을 받는 부조리는 없다. 둥그렇게, 멀리 보자. 그 순간 내 안의 부처가 춤을 춘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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