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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 종풍 잇는 동자승 얼굴엔 ‘日日是好日’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 선종(禪宗)사찰 순례기

10. 운문산 대각선사(大覺禪寺·운문사) 끝

<사진설명>운문산 대각선사는 근대에 복원, 운문문언 스님의 종풍을 잇고 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乾屎厥)”
“석가여래께서 생존하시던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중이 너무 오래 섰으니, 속히 세 차례 절을 하라.”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입니까.”
“소주(蘇州)의 마황(麻黃)과 익주(益州)의 부자(子)니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노주(露柱)가 개구리를 삼키느니라.”

중국 선불교에서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과 더불어 선가오종을 형성했던 운문종의 원류 운문문언 스님은 학인들을 제접함에 있어서 이렇게 짧은 어구로 대답하고 지도했다.

운문(雲門·864∼949) 스님은 소주 중오부의 가흥 사람이며 속가 성은 장 씨다. 15세를 전후로 출가, 구족계를 수지한 운문 스님은 황벽 화상에게 법을 이은 목주 스님에게 갔다가 목주의 권유로 설봉의존 스님 문하에 들었다. 당시 중국 선가에서는 북(北) 조주, 남(南) 설봉이라 할만큼 설봉 스님의 명성이 높았고,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상골산 설봉사에서 수행중인 대중 수만 해도 10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운문은 설봉 스님 문하에서 인연을 거듭하며 육조 혜능대사의 법을 이은 청원행사로부터 석두희천, 천황도오, 용담숭신, 덕산, 설봉으로 전해진 법을 이었고, 908년 스승 설봉이 입적한 뒤에 훗날 운문종의 발상지가 된 운문산에서 법을 펴기 시작했다.

광동성 소관시에서 서북방향으로 50km 거리에 있는 유원 요족자치현 운문사. 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도량인 조계 남화선사에서 차량으로 1시간 30여분 거리이고, 육조단경을 강설했던 소관시 대감사에서는 1시간 거리에 있다. 남화선사에서 비포장 도로와 고속도로를 번갈아 가며 1시간 30여분을 이동해 도착한 운문사는 근대에 복원한 사찰임에도 옛 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흔히 운문사로 불리는 이 절의 이름은 운문사가 아니다. 패방을 지나 천왕문 앞에 서니 사찰의 이름을 알리는 편액에 운문산(雲門山) 대각선사(大覺禪寺)라고 적혀 있었다. 운문 스님이 몇 년에 걸친 불사 끝에 당나라 말기인 927년에 창건한 이 절의 첫 이름은 광태선원(光泰禪院)이었고, 이후 황제의 칙령으로 966년에 대각선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운문사로 불리는 것은 학인들과의 문답에서 항상 1구나 2구, 혹은 3구 등 짧은 문구의 대답으로 가르침을 전했던 운문 스님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문 스님의 짧은 문답을 통한 가르침은 곧 운문종의 종풍을 이르는 일자관(一字關)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가오종 중 운문종 발상지

<사진설명>운문사 동자승들이 축구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운문사, 아니 대각선사에 못미처 오른편으로 ‘운문사’라고 쓰인 작은 패방이 있는데, 이곳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이 절에는 비구니 스님 150여 명이 상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차창 밖에 비친 모습을 잠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서 10여분 더 올라가면 바로 대각선사, 즉 운문 스님의 운문사가 나타난다. 운문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사하촌이 없고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노점상도 없다. 산사의 모습 그대로다.

천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비롯해 조사전, 종루, 인수당, 조전 등의 전각이 서로 처마 끝이 맞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순례단 외에 또 다른 순례객은 보이지 않았다. 200여 명의 비구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이라고 하나, 각 전각을 책임진 스님들 외에 다른 스님들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대웅보전에 들어서니 18나한과 24제천상이 새겨진 대형 도자기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대웅전 옆쪽에 자리한 조사전에는 운문 스님의 좌상이 유리관 안에 봉안돼 있다. 여느 선종사찰과 달리 탑이 없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인데, 애초에 운문 스님의 진신상이 선탑에 봉안돼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완전히 파괴되면서 탑이 사라지게 됐다.

조사전을 나와 조전으로 들어서는 입구 양쪽 주련에 운문 스님의 유명한 선학 이론인 운문3구법이 새겨져 있다. 운문 스님이 어느날 법석에서 “내게 삼구화(三句話)가 있어 대중들에게 보인다”면서 ‘함개건곤(涵蓋乾坤·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다), 절단중류(截斷衆流·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는다), 수파축랑(隨波逐浪·파도를 따라 흐름을 같이 한다)’을 설하고 “만약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린 참 학인이 있다면 장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했다. 이 삼구는 일심문, 진여문, 생멸문을 말함이니 당시 운문의 문하에서 수행중이던 학인들 가운데 이 삼구에 해탈한 이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설명>조전 입구에 걸린 주련에 운문삼구법이 적혀있다.

1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운문사에는 957년에 만들어진 ‘대한 소주 운문 광태선사 광진대사 보성명병서’와 964년에 세워진 ‘대한 소주 운문산 대각선사 운광성홍명대사 비명병서’탑비가 있다. 이 두 탑비는 개산 초창기 모습과 교화를 통해 발전해나가는 당시 정황을 기록해 운문사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광동성 중요 역사문물이기에 문화혁명의 잔혹한 파불을 피할 수 있었다.

운문사는 운문 스님이 창건한 이래 흥망성쇄를 거듭하며 1101년, 1368년, 1469년, 1583년, 1617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중창불사를 했다. 그리고 허운 화상이 1940년대에 재건했으나, 문화혁명 때 또다시 철저하게 파괴됐다. 지금의 모습은 1982년 불원 화상이 상주해 복원하면서 형태를 갖추었고, 그 후로 수행도량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옛 운문 스님의 가르침이 살아나고 있다.

1982년 재건…소박함 유지

절 앞에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듯, 배 모형을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방생지가 있고 그 오른편으로 동자승들이 거주하는 건물이 있다. 축구와 농구를 하면서 놀이를 즐기는 동자승들은 세속의 교육을 받지 않고 이곳에서 불법을 배우고 있다. 

곳곳에 화두 글귀가 붙여진 건물에 거주하는 동자승들은 운문 스님이 “보름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다만 15일 이후의 일을 일러보아라”하고는 머뭇거리는 제자들 앞에 스스로 써 보인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 날)’의 뜻을 아는 듯, 해맑은 웃음으로 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광동성 소주시=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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