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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11. 무상(無常)-①죽지랑을 그리며

기자명 법보신문

사라짐의 슬픔에서 존재는 출발한다

<사진설명>죽지랑은 빼어난 용모의 화랑이었다. 아마도 그의 얼굴은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불상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 흐드러지며 절정을 이루면서 산천을 수놓던 꽃들이 진다. 신록들이 처음의 푸름과 신선함으로 어루만져 주지만 온 세상을 생기로 번쩍이게 하던 그 새잎들도 곧 낙엽이 되어 하나 둘 사위어 가리라. 울고 싶은 만추의 하루다. 늦은 봄날 천여 년 전의 신라에서도 무상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가 있다.

지나간 봄 다일 것이매/안 계실사 울 시름/두두룩함이사 좋아 끼치신/얼굴이 해를 셀수록 헐어가는구나//눈안개 돋을 지경의/만나기 어찌 상상이나 하리//郞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누추한 거리에 잘 밤 있으리.

신라 효소왕(孝昭王: 692~702) 때 낭도인 득오가 자신의 주군인 화랑 죽지랑을 그리며 부른 향가, ‘죽지랑을 그리며’이다. 죽지랑은 김유신에 버금가는 신라 통일의 전쟁 영웅이자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을 지낸 정치가이자 득오가 이리 절절히 그리워할 정도로 인품과 덕이 뛰어난 화랑이었다. 득오가 신라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고향인 모량리 부산성에 가서 창고를 관리하는 부역을 하며 그곳의 우두머리인 익선에게 갖은 수모와 고초를 당하던 시절에 부른 노래이다.

꽃처럼 아름답던 화랑

지나간 봄 다일 것이매’에서 지나간 봄은 죽지랑이 신라 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으로, 신라의 내정을 총괄하는 시중으로 이름을 높이고 권세를 휘두르던 때이자 득오로서는 그런 위인을 만나 그 밑에서 문무를 수련하던 좋은 시절을 말한다. 지나간 봄으로 다일 것이라는 것은, 그러던 죽지랑이 이제 늙어 아무런 힘이 없는 할아버지로 전락하였으니 옛날의 영화는 이미 지나가버린 봄과 같다는 것이다. 익선에게 끌려와 온갖 고초를 겪는 득오의 상황에서 보면 이는 죽지랑과 지내던 시절이 지난 봄으로 마지막일 것이라는 좌절감을 표현한 것이다. 죽지랑의 나이도 나이이지만 그만큼 부산성 창고지기로 보내는 삶은 절박하다.

두두룩함 좋은 얼굴이란 무슨 의미일까? 화랑은 말 그대로 꽃사내, 그리스인처럼 얼굴을 비롯한 신체미를 숭앙한 집단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자가 화랑이 되었고 또 낭도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에 아름다운 얼굴의 기준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는 지금 남아있는 경주 남산의 불상, 특히 화랑의 현신으로 화랑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미륵 삼존불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을 보면 한결 같이 두두룩한 볼과 살을 가지고 이상적인 원융미를 추구하고 있다.

이 대목을 겉으로만 읽으면 화랑의 표상일 정도로 아름다웠던 죽지랑이 이제는 늙어버렸음을 그 낭도인 득오가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효소왕 원년(692년)에 불렀다 하더라도 그때 죽지랑의 실제 나이는 60세가 넘는다. 그러니 화랑의 표상일 정도로 아름다웠던 얼굴이 다 헐어져 갔다는 표현은 적절하다. 여기엔 죽지랑이 늙은 데 대한 안타까움, 그처럼 삶이 무상함에서 느끼는 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얼굴만 늙어갔는가? 두두룩한 얼굴의 숨은 의미는 죽지랑이 대장군과 시중을 지내며 영화롭던 시절을 말한다. 그것이 해를 세 갈수록 헐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죽지랑의 영화가 사멸하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명이다. 그냥 해가 갈수록 헐어간다고 하면 될 것을 ‘해를 세 갈수록’이라고 표현했다. 득오가 해를 꼽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득오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큰 것이다.

‘눈안개’는 눈에 눈물이 글썽여 안개처럼 끼었음을 뜻한다. 초구에서 득오는 부산성 창직으로 와 다시는 죽지랑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함을 읊었다.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익선 밑에서 창직을 수행해야 하는 현실에 존재해야 할 당위는 죽지랑과 다시 만나는 일이다. 득오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이것을 고대한다. 이런 심정의 시적 표현이 ‘눈안개 돋을 지경의 만나기’이다. 그러나 이는 상상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이상을 꿈꿀수록 현실의 절박함은 드러난다. 그래서 득오는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현실의 비참함을 드러내고 있다.

결구(3연)에서 지금까지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에서 빚어진 분열은 ‘낭이여!’라는 감탄형의 차사(嗟辭)로 인하여 전환을 맞는다. ‘낭이여 그리는 마음의 가올 길’이란 낭을 그리는 마음의 행로를 뜻한다. 삼국 통일전쟁의 영웅이자 집사부 중시를 맡았던 정치가이면서 인격이 높았던 죽지랑을 따라가는 길이다. 죽지랑을 단순히 흠모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의 이상과 실천을 지향하는 길이다.

용모도 세상도 모두 변해

“누추한 거리에 잘 밤 있으리.”라고 한 것은 잘 밤이 없겠다는 것이다. 고매한 인품과 용맹성, 한 나라를 통치하는 지혜를 겸비하였던 죽지랑의 이상과 실천을 따르자니 누추한 거리에서도 잘 밤이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지만 그 이상을 따라 굳은 실천을 하겠다는 의지를 펴고 있다. 여기서 누추한 거리는 창직을 수행하는 공간인 모량리 부산성이자 득오가 맞은 시련의 공간을 뜻한다. 그렇다면 익선의 밑에서 창직을 수행하는 고된 일을 할지라도 죽지랑을 따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자 죽지랑의 정신을 지향하여 어떤 시련에 있든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이런 뜻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인이 놓인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이 노래는 다양한 의미로 읽혔을 것이다. 화랑이 아주 많이 쇠락한 상황에서 득오가 아닌 다른 화랑도가 이 노래를 불렀다면? 이때 죽지랑은 화랑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변한다. 이 경우 이는 신라인이 화랑의 몰락을 슬퍼하면서 화랑의 이상을 구현하여 화랑이 몰락한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래이다.

승려랑이나 동령승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면 또 어땠을까? 이 경우 죽지랑은 무상(無常)과 일체개공(一切皆空)을 드러내는 상(相)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간 봄 다일 것이매”와 “두두룩함 좋아 끼치신/얼굴이 해를 세어나갈수록 헐어가는구나”에는 불교의 존재론이 깃들어 있다. 인간 존재가 슬픔(悲)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되는 근원은 무상(無常)에 있다. 올 봄이 있었지만 그 봄과 똑같은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삼국통일의 영웅이자 아름다운 용모를 지녀 화랑의 표상이었던 죽지랑도 늙어버렸다. 신라 정신의 표상인 화랑도 쇠퇴하였다. 세계는 상(常)한 것도, 아(我)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한다고 착각한 현상계란 근원에서 바라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무상과 공을 인식하고서 자신의 존재를 표명하고자 할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는 슬픔이다.

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적 화자는 꿈을 모색하지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마저 어려울 정도로 현실은 가혹하다. “눈안개 돋을 지경의/만나기 어찌 상상이나 하리”에서 나타나듯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슬픔을 초월한 만남을 꿈꾸지만 슬픔의 원리는 모든 현상계에 두루 통한다. “어찌 상상이나 하리”에는 삶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스며있다. 현실의 절박함은 이상을 꿈꾸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무상함과 이에서 오는 번뇌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 또한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공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고통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나 해탈의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삶이 고통이라고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불교의 운명론은 더 더욱 아니다. 누구나 육바라밀로서 수행정진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

정진하므로 허무하지 않다

모든 법이 내가 없고 일체가 고통이지만 상락아정(常樂我淨)한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一切唯心造). 누추한 거리든, 아니든 어느 곳에서든 이상을 실천하고자 할 때 숙명의 구속, 고통의 순환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이를 항상 지향하여 대립과 갈등을 원융시키고자 하는 시적화자는 ‘누추한 거리에서’ 잘 밤이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누추한 거리’는 삶 자체가 고통인 사바세계, 불난 집[火宅]을 뜻한다. 여기서 시적화자는 이상을 추구한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죽지랑은 미륵의 화신이다. 죽지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미륵불을 따르는 것이며, 미륵불을 따름은 하생이든 상생이든 설법을 통해 득도를 하는 것이며, 특히 신라에서는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삶과 미완을 보완하는 희망과 이상을 지향함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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