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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일제시대 불교계 일본 유학생들의 행적

기자명 법보신문

독립운동 활력-왜색불교 앞장, 양날의 칼 작용

1910년 이후 일본 유학 승려 해마다 큰폭으로 증가
대처식육 논란 야기…총독부의 도구로 전락 비판도

<사진설명>1927년 3월 동경조선불교유학생 졸업생 송별 기념 사진. 앞줄 우측부터 이지영, 김신교, 조은택, 김창운, 서원출, 박창두, 뒷줄 우측부터 김태흡, 김동진, 강정룡, 장담현, 변설유, 김잉석이다. 사진=민족사 제공.

일제시대 불교 교단은 다른 종교에 비해서 포교사업과 교육제도 면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

근대 학교 설립도 기독교나 천도교에 비해서 뒤졌고, 포교사 숫자도 부족하였다. 종래의 강원교육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감각이 뒤지는 학인들을 배출하였고, 신식 교육기관은 교육방침의 부재와 경영 미숙으로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교단이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능력있는 포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인재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워와 교계의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해외 유학생 파견을 주장한 바 있고, 그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대학에서 수학하고자 한 바 있다. 이영재와 같은 승려는 『조선일보』에 게재한 논설에서 유학승들이 안정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1920년 일본 대학 종교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조선일보』에 총 22회에 걸쳐 「조선불교혁신론」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1925년 성지 순례 및 연구를 위하여 인도 유학길에 올랐으나 구법 순례를 하던 중 1927년 스리랑카에서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일본 유학승들은 대체로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각 교구 본사에서 공비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 경우이다.

둘째는 1920년에 조선불교대회로 발족하여 1925년에 재단법인으로 전환된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조선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참여하여 구성된 조선불교단에서 파견한 유학생이 있다. 조선불교단은 친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본의 전직 수상과 귀족원 의장, 경제계와 문화계의 주요 인사들이 고문이나 이사로 참여하였고, 조선측에서는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이윤용 등 대표적인 친일파들로 구성된 불교 외호단체였다.

셋째로는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승려들도 있다. 일본으로 유학간 승려들은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공비 유학생의 경우 파견한 사찰에서 일정한 방침이 없어 중도에 학비 송금이 중단되어 소환되는 경우가 있었다. 고학생의 경우 상황은 더욱 열악하여 신문 배달을 하거나 생활 전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학습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였고, 초기에는 언어 장벽으로 인하여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불교계 유학생 파견은 나라가 망한 1910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1933년 일본에 유학했던 강유문이 쓴 글에 의하면 1914년경에 도쿄(東京)에 13명의 불교계 유학생들이 있었다고 하며, 1924년에는 도쿄에 30여명, 쿄도(京都)에 20여명 도합 5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유학 승려들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유학 승려들은 1920년 4월 도쿄에서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듬해 이 단체는 재일조선불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24년 5월 이영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금강저(金剛杵)』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는 토론회·강연회·체육대회 등을 통하여 현실 문제를 토론하였다. 유학승들은 국내 불교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였다. 1920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일본 임제종과 연합을 시도하였을 때 이들은 6월 4일자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선불교와 일본 임제종의 연합이 부당함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유학 승려들은 교토에 있는 임제종 대학과 중학에 재학하던 20여명의 조선 불교계의 학생들에게 퇴학 권고문을 발송하여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고자 하였다.

일본 유학 승려들은 국내의 조선불교청년회 승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유학승들이 귀국하면 조선불교청년회 회원이 되어 활동하였고, 국내의 청년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재일조선불교청년회에 가담하였다. 일본 유학승들이 국내 불교계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8년 각황사에서 조선불교학인대회가 개최되었다.

학인대회의 성격은 전국 강원의 학인들이 강원 제도와 내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회의 결과 학인연맹이 결성되고 기관지 『회광(回光)』이 간행되게 되었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는 기관지『금강저(金剛杵)』에 학인대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소개하는 논평문을 게재하였다. 일본에 유학한 승려들 가운데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운동 대열에 동참하였던 승려들도 있다.

1930년 불교계의 교정(敎政)을 확립하고 대중불교를 실천하기 위해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인 만당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승려가 많다. 만당의 구성원 가운데 현재까지 명단이 밝혀진 당원 24명 가운데 15명이 일본 유학을 한 경력이 있는 승려이다. 동경 유학생들은 1933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회에서 중앙불교전문학교 폐교를 결정하자 거부 의사를 불교계에 호소하여 철회시키기도 하였다.

일본 유학 승려들에게 이처럼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불교의 대처식육 풍습을 도입하여 불교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일본 유학승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귀국하여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귀국 후 총독부를 방문하여 학무국장을 비롯하여 편집과장과 사사계(社寺係) 주임 등을 만나 인사를 한 승려들도 있다. 당시 일본 유학승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살펴보면 이들은 불교계의 기성 세대들과 많은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설명>‘승려육식처대’ 가부 관련 투고 공고문. 이 공고문은 대처식육 문제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유학승들은 귀국할 때면 결혼을 하여 속인이 되어서 온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을 길러준 은사인 주지들이 고루하고, 완고하다 하여 주지 축출운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셋째로 불교를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학승들이 일본에서 불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공비 유학생의 경우 언제 학비 송금이 중단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불교 공부에 몰두할 수 없어서 다른 생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본사로 돌아오면 주지들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울까 하여 피한다는 것이다. 유학승들이 환속을 하게 되면 별달리 생계를 마련할 방도가 없으므로 졸업을 하게 되면 곧 실업자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계의 일본 유학승 문제는 1920년대 귀국한 숫자가 많아지면서 심각하게 대두된다. 이들 가운데 나이와 경륜으로 보아 본사 주지가 될 자격을 갖춘 승려가 많아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유학승은 본사 주지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사법에는 비구승만이 본사 주지가 될 수 있도록 자격 조건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유학승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1926년 승려들의 대처식육을 허용하고, 사법을 개정하여 종래 비구승만이 취임할 수 있던 본사 주지를 대처승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 유학승 가운데 김태흡은 귀국 후 1930년대 후반 총독부에서 정신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한 심전개발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다.

그는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전임강사 신분이었지만 총독부의 요청으로 대학의 전임강사직을 사임하고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라고 선전하였다.

일본 유학승들은 당시 교계의 중심 세력이던 본사 주지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지만 결국 총독부 관권의 힘을 빌려서 제도를 고쳐 그들의 권익을 확보하였다. 선진 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그들은 교계의 여론을 형성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알게 모르게 일본 문화에 젖어 있었다. 이들의 성향을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귀국하여 본사 주지가 되거나 불교대학의 전임강사나 학감이 되어 제도권에 편입된 승려들은 총독부 권력과 타협하여 친일의 길을 걸은 부류이다.

또 다른 부류는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고 재야에 머물면서 불합리한 현실에 침묵한 승려였다. 어느 경우이건 이들이 일본 유학을 하였다는 사실은 일본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가지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일본 불교를 모방하여 대처식육을 한 장본인이다.
대처식육의 풍습은 해방 이후 불교계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일본 유학승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불교계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일제와 타협하여 민중들의 삶에 고통을 더하는 측면도 있었다.

결국 일본 유학승들의 평가 문제는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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