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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은 공과 무를 실현한 법석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7.06.1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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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총림 지선 스님의 6·10 항쟁 4일간 일기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어언 20주년이 흘렀다.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고불총림 유나 지선 스님은 “민주항쟁 당시 우리 불자들도, 스님들도 역사적인 현장의 주인으로서 함께 했었다”며 6·10 민주항쟁의 시작을 알렸던 성공회 성당에서의 6·10 대회와 대회 준비 과정의 긴박했던 나흘간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보내왔다. 성당 옥상에 올라가 노태우 대통령 후보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민주항쟁의 막을 올린 스님은 “그 길은 승속불이, 수행과 현실참여가 둘이 아닌 길, 공의 실현, 무의 실현인 그 자리 그 길이였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지선 스님은 덕숭총림 선방에서 하안거 중이다.    
 
一念不生 處處佛像이니
語黙動靜이 事事佛供이라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전체가 다 부처의 몸이요
그 자리에서는 어묵동정과 하는 일들이 불공 아님이 없다.
혜월선사의 말씀이라고 들었다.

지난 20년 전 6∙10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던 날, 나는 국민의 한 사람 한 단체의 대표로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다. 한때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어 가야할 전중생의 자주와 민주와 인권과 평화와 통일의 완성이라는 대작불사를 향해 나아가야 할 그 길 위에 아직도 서있다. 한 생각을 내어도 한 생각을 내지 않아도 모습은 달라도 함께 가야할 불이(不二)의 길, 무슨 차별과 간택이 있으리요,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데, 그저 그윽할 뿐이다.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상임대표직과 사회 여러 단체 그리고 불교운동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나는 역사적인 1987년 6월 10일 서울성공회 대성당에 있었던 6∙10민주항쟁 집회의 지도부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국민주화 운동대표들로 결집된 국본의 60여명에 달하는 공동대표들이 모여 결의하기를 성공회성당에 3일전에 들어가야 만이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만약 성당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배신자라고 까지 말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불교운동진영에서는 진관 스님과 내가 그곳에 들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는 3일전 6월 7일 석양이 드리워질 즈음 비장한 각오를 하고 성공회 성당으로 갔다. 그런데 이미 경찰에서는 눈치를 채고 겹겹이 성당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우리는 멀찌감치 주위를 맴돌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성당 뒤편 수녀원의 숲 속 담장을 넘기로 했다. 승려로서 할 일은 아니지만 어찌하랴, 못 들어가면 우리 불교계만 이역사적인 민주화 대작불사에 동참하지 못함을 생각할 때 앞뒤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재빨리 담을 뛰어넘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달려오는 경찰의 손에 발목을 잡혔을 것이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적 안도감으로 담장 밑으로 떨어지자 그 부근에서 일을 보던 수녀님들께 들켜 소란이 벌어졌다. 왠 스님들이 갑자기 나타나니 그럴밖에. 결국 신부님이 나와 우리들의 신분과 용무를 설명하여 무사히 신부님의 거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에 박형규, 금형균, 오충일 목사, 박종기 신부, 고 계훈제 선생님, 김병오 전의원, 김명윤 변호사 일곱 분이 들어와 있었다. 밤이 되어도 더 이상 국민운동본부 지휘소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밖에서 지휘하는 또 다른 실무팀이 있어 인명진 목사 등에게 연락을 해보니 더 들어올 수도 들어올 사람도 없다고 했다. 상임공동대표 몇 분과 공동대표 몇 분에게 전화를 해보니 감금됐거나 아프시거나 사정이 있어 더 들어 올수가 없다고 했다. 전국적인 거사를 앞두고 그렇게 철저히 결의를 했건만 상임의장단 대표는 나를 포함해서 고작 네 명이라니 섭섭한 생각도 했다. 실무진들까지 십 여 명은 곧바로 업무를 시작해서 밖의 종로에 있는 임시 지휘소와 계속 연락하고 보고를 받으며 6∙10대회를 준비하면서 대국민 홍보에 열중했다. 성당 안에는 조선, 동아, 중앙 등 신문기자들이 주야로 대기하면서 취재하고 텔레비전 방송사도 마찬가지 여서 우리의 모든 생활은 3일간 계속 뉴스로 보도되고 있었다. 전 국민적으로  대회를 준비하느라 전두환 정부와 극도로 긴장관계에서 세상은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험악한 분위기였고 계엄령 발표를 하느니, 군인들이 국본간부들을 급습하여 잡아들이니 어디서 어떤 사고가 났느니 그야말로 전국은 혼돈의 악몽 그대로였다.

6월 10일까지 우리가 하는 일은 지휘보고의 상황실 운영이었고, 식사 때면 국민의례, 기도축원 우리의 소원은 민주, 자주, 통일 3절까지 노래를 부르면 인터뷰를 하거나 각계의 결의를 다지는 반복되는 일과였다.

6월 8일에는 신문방송의 보도를 보고, 한영애, 유시춘(작가), 이기택 등이 합류를 했다. 이날은 성공회 김성수 대주교께서 대결단을 내려 6∙10대회를 치르기로 최종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교단의 찬반논쟁도 있었고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에 대해서는 일부 신도들이 사제관 안에서 스님들까지 끌어들여 숙식을 함께 하는 등 모의를 계속하니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가 많았다. 난감해진 신부들을 대신해서 김성수 대주교가 잘 무마시키곤 했다. 나는 살아남아서 밖에 나가면 우리가 먹은 양식은 곱으로 갚겠다며 쌀 한가마를 보시하기로 약속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성직자(나는 성직자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들은 교리와 교단, 서로 다른 종교적인 입장을 이해하고 교류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6월 9일에는 김현수 의원, 양순직 부총재, 한명희, 이기택 씨 등이 정치권을 대표해 들어와 합세하고 각종 신문 및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도 하면서 대대적인 민주혁명거사 준비의 완료 속에 핵 폭풍전야를 맞이하고 있었다. 성공회 밖의 종로에 있는 국본 사무실과 연락하는 등 바쁘게 돌아가는 정국현황에 대해 단편적으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실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나와 진관스님은 6.10대회 때 사용될 불교도 결의문을 작성했다. (참고로 사회민주화운동, 불교계 운동의 모든 자료는 사과상자 일곱 상자 분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 기증했으며 기념관이 세워지면 누구나 열람가능하다) 그런 와중에 연세대에서 시위도중 최류탄에 부상을 당했다던 이한열군이 사망했다는 부음을 전해 듣고 우리는 묵념을 하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인사들이 계속 모든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재야인사와 서경원 농민대표, 제정구 천사협대표, 김현무 의원, 양권식 신부 등 이었다. 우리는 목숨을 각오하고 거사전야의 마지막준비와 결의를 다졌다.

드디어 6월 10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지미사와 불교계 및 사회단체의 지지대회나 입장발표가 있었고, 성당 안에서의 국본의 6.10대회는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를 기해 국본과 재야인사를 대신해서 내가 성공회성당 옥상에 올라가 같은 시각에 장충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는 노태우 대통령 후보 무효선언을 하면, 이 신호에 맞춰 밖에서는 박용길(문익환 목사의 부인)장로가 민추협 부근에 시민들 속에서 보랏빛 목도리를 풀어서 흔들 때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고,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6월10일 이날의 대회식순은 노태우 대통령 무효 선언이라는 국본의 첫 방송(오전 10시)을 시작으로 해서 그 식순이 끝나면 모두 성당옥상에서 내려와 광장 모여서, △대회선언 △국민의례 △대회사-박형규 목사 △고문살인 조작 규탄 및 4.13 호헌규탄(민가협 공동의장 유시춘 대독) △호헌 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에 대한 각계의 결의문-불교(진관 스님 낭독), 기독교, 천주교(김승훈 신부를 대신해 양권식 신부 대독), 민주당(김영삼 김대중을 대신해 양순직, 김명윤 대독), 민통련(계훈제), 여성계(이우정 여성 단체 회장을 대신해 한명희 대독), 한승헌 변호사 △대회선언문-김재열 신부 △결의문 낭독-김병오 국본 홍보위원장 △만세 삼창-계훈제 상임공동의장 등 식순으로 대회를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처음 계획은 박형규 목사가 성당 옥상에 올라가기로 했는데 나에게 권고하여 대회사를 하기로 했던 내가 바뀐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러자 100명의 대회인원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스님(중)이 성당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느냐고 일부 신도들이 반대를 하여 대회가 난감해졌는데 주교와 신부님의 간곡하고 분연한 결의로 설득하는 말씀 앞에서 모두 묵인하기에 이른다. 나는 먼저 성당 안의 성상 앞에 나아가 합장하고 축원을 했다. ‘이 나라 이 민족 민중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부득이 성당 옥상에 올라가게 됐으니 이해하시라’라며 나는 비좁은 틈바구니 길을 굽이굽이 올라가 옥상에 섰다. 건장한 청년 여러 사람이 사방에 설치된 네모난 대형 마이크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고, 시청을 중심으로 한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천천히 분명하게 외쳤다.

“국민 여러분 여기는 국민운동본부 6.10대회장입니다. 지금부터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의 첫 방송을 시작합니다. …중략… 국민여러분, 지금 이 시각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선출한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무효를 선언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 외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발아래 시가지는 하얀색 최류탄 구름이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경적소리, 비명소리, 최류탄 쏘아대는 소리로 서울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통한, 그러나 당당한 심정으로 옥상을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100여명의 각계 대표자분들과 어렵게 들어온 시민들 앞에 섰다.

그리고 식순에 따라 우리는 대회를 마쳤다. 대회를 마친 우리들은 시내에 일어나고 있는 시위소식을 들으며 방명록에 서명하는 비장한 시간도 가졌다. 우리는 단식농성을 하다가 밖에서 기다리던 전투 경찰들에 의해 연행됐다. 죄목은 국가보안법, 국가전복음모 등 다섯 가지였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으로 출옥하여 이한열 열사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국민의 힘이 우리를 살려낸 것이다.

그 후 나는 험난한 길을 가게 된다.
그 길은 승속불이, 수행과 현실참여가 둘이 아닌 길, 공의 실현, 무의 실현인 그 자리 그 길이였던 것이다. 영웅심에서 일부러 한번 해보려고 가는 길도 아니요, 어려운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은둔하기 싫어 어쩔 수 없이 나아간 길도 아니요, 이 땅의 전 중생의 아픔과 함께하며 밝은 미래를 밝히기 위한 역사적 연기적 주워진 역할을 역량만큼 해냈을 뿐이다.

이제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기쁨도 슬픔도 회한도(無喜亦無憂) 없다. 삼계가 바로 비로자나 전신체요. 보현행 무궁무진한 실천법계가 아닌가, 그래서 처처불상이요, 사사불공 하는 무심 속의 바른 자세로 살려고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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