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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12. 무상(無常)②-조지훈의 ‘낙화’

기자명 법보신문

꽃이 지는 것은 우주의 법칙
사라지기에 존재는 인식돼

<사진설명>모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기에 더욱 빛난다. 연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면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탄할 것인가.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박익진 씨의 사진 ‘겨울 연밭’

봄날은 갔다. 그리 산천을 흐드러지게 수놓던 꽃들은 모두 지고 없다. 6월, 여름이 왔다. 녹음 짙은 숲을 바라보며 봄날의 회한에 젖고 싶은 가슴엔 지훈의 ‘낙화’가 제격이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괴테는 “하늘엔 별, 땅에는 꽃, 우리의 마음엔 사랑”이라 노래했다.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별이라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이다. 미를 모르는 이에게도 다가가게 하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흠뻑 빠지게 하고,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하는 매력이 꽃에는 있다. 게다가 고운 향기까지 더해지면 이 세상 어느 누가 꽃을 내치겠는가.

그리 우리의 눈앞에서 때로는 미의 향연으로 한껏 황홀하게 하고 때로는 끝 간 데 없는 그리움으로 밀물지게 하던 그 꽃들이 모두 진다. 바람에 지는 꽃들을 보면 누구나 슬프다. 서럽다. 그렇다고 바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다 언제인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질서는 하나

무상감에 젖어 지는 꽃들의 마지막 비행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는다. 어두운 하늘에 반짝이며 이상의 지표를 알려주던, 영원의 상징이던 그 별들도 하나 둘 스러진다. 피를 토하며 이별의 슬픔을 알리던 두견새 소리도 잦아들고 새벽빛이 희붐하니 먼 산이 가까이 보인다.

수묵화처럼 펼쳐진 산의 실루엣에 취하다가 다시 뜰을 바라보니 또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날린다. 문득 정신이 들어 촛불을 끈다. 날이 밝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마지막 비행을 더욱 뚜렷하게 보렴이다. 아니, 저리 아름다운 것들이 먼 길을 떠나는데 나만 홀로 밝음 속에 있는 것이 죄스러웠기 때문이리라.

반은 달빛에, 반은 동살에 꽃 지는 그림자가 뜰에 어리니, 하얀 미닫이가 보일 듯 말듯 붉게 물든다. 낙화를 오랜 동안 바라보니 낙화의 심상이 눈에 맺혔다가 다시 흰 한지로 바른 미닫이문을 스크린 삼아 점점이 맺힌다. 아니, 꽃이 지며 꽃에 담긴 생명들이 이제 다하였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붉게 물든 탓이다.

나라 잃은 일제 시대라도 좋고, 그런 시대적 맥락을 떠나서도 좋다. 속세가 싫어, 혹은 부귀공명이 싫어 이렇게 꽃과 더불어 사는 은자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꺼려한다. 속마음을 보이기 싫기도 하지만, 그들과 어울려 부유한 것과 귀한 것과 명예가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족하다. 질박한 삶이지만 꽃이 있어서 풍성하였고 호사를 누린 기분이었는데 꽃이 지니 그 호사도 끝이다. 은자의 애수란 그런 법이다. 그뿐인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보니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잘 안다. 낙화를 보며, 아름다운 꽃들이 지듯, 사람도 가고 우주 삼라만상이 다 변하며, 나도 언제인가 떠나야 할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 뒤에 떠오르는 탄성! “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우리는 꿈을 깨기 전까지는 꿈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새삼 덧없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은 아닐까? 한갓 꿈과 같은 것인데, 천상병 시인의 말대로 잠시 소풍 온 것인데 여기서 깨어나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 채 그리 악다구니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신라 시대 조신은 꿈을 통하여 삶의 무상을 깨달았다.

세달사의 승려 조신은 태수 김흔(金昕) 공의 딸을 보고 한 눈에 반하여 낙산사 대비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지성으로 인연 맺기를 수년이나 빈 끝에 마침내 그 뜻이 이루어졌다. 조신은 당대 최고의 미인인 김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행복하게 살았고 아이도 다섯이나 두었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점점 가난하게 되어 집이라고는 네 벽뿐이요 변변찮은 끼닛거리도 댈 수 없었다. 10여년 간 산과 들을 헤매다가 열다섯 살 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주려 죽었다. 움집을 짓고 구걸로 연명하다 열 살 난 딸이 개에게 물려 아파 울부짖자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겨우 말을 이었다.

‘마지막’이라 여기면 갈등 없어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나던 때에는 얼굴이 잘났으며 나이도 젊고 옷차림도 깨끗하였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감도 당신과 함께 입어가며 지낸 지 50여년에 이 같은 정분은 또 없었습니다. 은혜와 사랑은 한없이 깊어 두터운 인연이라 하였더니 근년에 들어 쇠약해져서 생긴 병이 해마다 더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닥쳐오자 방 한간, 국 한 그릇도 남이 주려 하지 않으니 온 동리에 부끄러움이 산보다 무겁습니다. 어린 것들의 추위와 굶주림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터에 부부 사이에 사랑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에 예쁘던 웃음도 풀잎의 이슬처럼 사라졌고 지초와 난초 같던 꽃다운 언약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버들꽃인 양 흩어졌구려.”

이어 부인은 아이들을 갈라 헤어지자고 제안하고 이에 생이별을 하며 피눈물을 토하는 순간 깨어나니 이 모두 꿈이었다. 조신은 삶이 무상인 것을 모르고 헛된 욕망을 품은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 대비보살 앞에 나아가 참회하고 참회하였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과 야만을 낳는다.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영원히 집권할 것처럼 발악을 하다 저항을 맞는다. 사랑하는 이가 영원할 것으로 알고 마구 대한 이들은 이별을 맞고서야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육체에 자만하여 몸을 마구 굴린 이들은 병상에 누워서야 지난 날들을 후회한다. 영생을 얻기나 한 것처럼 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며 위로만, 위로만 오른 자는 죽음의 선고를 받고나서야 그렇게 해서 올라 차지한 것이 한 조각 휴지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싱그러운 신록도 곧 조락할 것이요, 아름다운 얼굴도 세월의 더께가 내리면 주름살이 질 것이다. 그토록 예쁜 때깔로 숲 속으로 우리를 몰입시키던 단풍도 곧 그 빛을 마름하고 낙엽이 되어 길가에 뒹굴다 하나둘 스러져 간다. 이때쯤이면 모두들 왠지 모를 슬픔에 겨워한다. 쓸쓸함으로 거리를 헤매고 괜스레 애틋해져 차 한 잔을 마시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저문다는 것은 헤어짐도, 사라짐도, 끝남은 더 더욱 아니다. 사라진 것에 대한 슬픔 속에서 존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부모님을 잃고서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사랑하는 이가 돌아선 후에 처절한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름다운 고향산천이 개발의 삽질에 밀려 형해만 남고 나서야 지키지 못하였음 성찰한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존재론의 출발을 슬픔(悲)으로 보지 않았던가.

무상(無常)에서 오는 슬픔은 허무적이지도 패배적이지도 않다. 사라질 것이기에 무엇인가 의미를 남기려 하고 온 몸을 바쳐 지키려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만나 마지막처럼 아껴주고 보듬어준다면 무슨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무상은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는 미래지향적 사고이자 있는 것을 잘 보듬으려는 긍정적 자세이자 나를 고집하지 않는 평화적 사유체계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별? 황량한 대지에 흐드러진 꽃? 너와 나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사랑? 그러나 알지어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사라지기에 그리 소중하다는 것을.

영원한 것은 없다. 사라지기에 존재하지 않지만, 사라지기에 우리는 존재를 인식한다. 사라지기에 정녕 아름답고 우리의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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