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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14. 육바라밀②-이육사의 ‘절정’

기자명 법보신문

극한의 칼날 위에서 진리의 꽃은 핀다

“무지개는 꿈과 이상이며, 강철은 현실의며 의지이다.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작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확고하며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것이다.…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로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진설명>중생과 더불어 살기 위해선 전적으로 나를 버려야 한다. 사진은 작가 여동완 씨의 ‘비가 오는 중에도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

일찍이 시인 윤동주는 노래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 가야 겠다.//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육바라밀이란 다름이 아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 나보다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하며 고독하고 쓸쓸한 중생들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과 더불어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들을 더 건전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삶으로 이끌려 할 때, 그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 때, 가장 미천한 사람에게서 부처를 발견하려 할 때 육바라밀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보다 높이 있어서, 그들보다 많이 알아서, 그들보다 가진 것이 많아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든 나 자신이든,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변하고 언제인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무상한 존재 자체에 대해 자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부처를 발견하는 일이 내가 부처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구속의 계율’ 속 자유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민중과 함께 하겠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공장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그것이 드러나면 바로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들의 구속과 고문이 따랐기에 생명을 걸고 비밀을 유지했다. 그렇게 소식이 끊겼던 후배를 5년인가 6년인가 만에 만났다. 내 나름대로 힘들었을 것을 나열하며 그를 위로하였다. 그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형! 수시로 밤새워 일하는 것도, 연속하여 열 시간 이상을 의식화 작업을 하는 것도, 한 평 남짓한 쪽방에서 한여름을 견뎌내는 것도, 악덕 기업주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할 만하였어요. 제가 가장 어려운 건 아직 기름기가 남은 배 때문인지 새우깡을 안주로 놓고 거의 매일 깡소주를 마셔가며 그들보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그들의 고통과 하소연을 가슴에 담는 것이었어요.” 인생을 통해 그렇게 부끄러운 날도 또 없었다. 중생과 더불어 함께한다는 것! 말로는 쉬워 보여도 나를 전적으로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나의 버림 뒤에 따라야 할 것은 다시 세움인데 이를 유지하려면 거기엔 삶의 원칙이 필요하다. 깡소주를 먹으면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매일 좌선을 하고 운동을 한다든지, 며칠을 굶은 상황에서 맛난 음식을 만났다 하더라도 내 입에 먼저 가져가지 않으며,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가슴에 상처를 남길 말을 하지 않으며, 며칠째 밤샘작업을 하여 온 몸이 녹초가 된 지경에서도 몇 쪽씩 책을 꼭 읽고 잠자리에 든다는.

12시 이후에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든지, 매일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선정을 한다든지, 오랜 시간동안 등을 바닥에 대고 잠을 자지 않는다든지 하는 승가의 원칙을 평범한 중생들이 지키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계율이란 것이 없다. 사회에서 공동으로 세운 계율이라 할 법조차 지키지 않는데 일상의 삶에 원칙이 깃들 리가 없다. 지하철에서 막무가내로 돌아다니고 떠드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면 아이의 기를 죽인다고 그 부모가 항의하는 세상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딸을 겁탈하는 패륜마저 다반사로 일어난다.

계율이란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움이다. 소극적 자유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 자유란 나의 장애를 내 스스로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여자의 집요한 육탄 공세를 받아들여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 자유로운가? 오히려 허탈감이 들 것이고 곧 죄책감과 수치심이 온통 칭칭 옭아맬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철저하게 도덕적인 인간이었다는 아이덴티티가 온통 해체되는 분열 상태에 놓일 것이다.

하지만 황진이를 거부한 서경덕처럼 계율을 지키는 순간 나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삶엔 분명 매순간 고통과 갈등이 따른다. 하지만 긍지란 욕망을 억압한 자아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거기엔 유혹을 이긴 자의 긍지가 있고 존재에 대한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있으며 자기를 실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황홀감이 있다. 그 자유의 황홀감 속에서 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고요해진다. 이어서 무명과 번뇌를 끊고 마음의 평안에 도달한다. 계율은 내가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길이자 선정을 하고 지혜를 이루는 바탕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절정’ 전문이다. 당대의 맥락에서 읽으면, 매운 계절이란 총각들은 총알받이로 내몰고 처녀들은 일본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삼으며 우리의 거의 모든 물자를 수탈하고 어린애와 임산부마저 학살하던 일제시대를 말한다. 그런 일본 군국주의의 압박에 시적화자는 북방으로 내몰리고 내몰리다가 서릿발 칼날진 곳으로까지 밀려나 그 위에 섰다. 그만큼 일제의 약탈과 학살, 야만은 극악하여 민족은 모두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절망적 상황에 놓인다. 그 상황에서 길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꾼다. 강철 같은 무지개란 무엇일까? 변증법적이다.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해가 뜨면 곧 사라진다. 강철은 단단하고 오랜 동안 변하지 않지만 아름답지 못하다. 무지개는 꿈과 이상이며, 강철은 현실이며 의지이다. 그런 극한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작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확고하며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기에 겨울이란 시련은 오히려 강철처럼 단단한 이상을 꿈꾸는 토대다.

마찬가지이다. 불에 달군 돌을 들고 용맹정진한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정진이란 서릿발 칼날진이란 표현으로도 모자라는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이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로 오로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다 보면 사람들은 신경림이 ‘길’에서 노래한 것처럼,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은 밖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다. 길은 안으로, 내 마음 속으로 뻗어 있다.

계에 의지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 자신을 고요하게 한다. 그리하면 선정에 이르고 그 속에서 자연스레 진리를 만난다. 남으로부터 들어서 이룬 지혜에 나 스스로 사려 깊게 생각하여 얻은 지혜를 더한다. 진리를 보아 망념을 끊는다.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끊고 닦고 또 닦으면 우주의 이치를 깨달으며 결국 해탈에 이른다. 그리하여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통일하면 참 지혜의 빛이 나를 밝힌다. 그 순간 강철처럼 단단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진리가 내 마음 속에 선다.

길은 내 안으로 나 있다

하늘이 어둡다 어둡지 않다 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리? 거기 별만 반짝이고 있다면 별빛이 뿌려진 길을 따라 고독하지만 꿈과 행복에 가득한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난하다 하더라도 가야할 길이 있고 그 길에 별빛이 깔려 있다면, 걸어야 할 목적과 의미가 있다면 길을 걷는 나그네는 행복하다. 그의 삶은 의미로 가득하다. 산사태가 일어나 길이 끊기고 태산이 막아선다 하더라도, 가다 짐승이나 도적에 쫓겨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에 놓였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걷는 자, 그는 반드시 부처를 만나리라.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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