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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강화 적석사

기자명 법보신문

수마 아픔 딛고 관음도량 일구다

<사진설명>1998년 8월 수마가 할퀸 강화 적석사(위). 10년 중창 불사 끝에 강화 고려산 적석사는 해동제일 관음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가졌다(아래).

1997년 10월, 강화 고려산 적석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선암 스님이 처음으로 해야 했던 일은 대웅전을 보수하는 일이었다. 비만 오면 새는 대웅전 지붕 전체를 천막으로 덮는 작업을 해야 했고 불단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위해 쥐들이 낸 구멍을 막기에도 바빴다. 오늘 구멍을 막으면 내일 바로 옆에 다시 구멍을 뚫어놓는 부지런한 쥐들 덕에 아침 6시 예불을 마치면 어디 또 구멍이 있나 하고 불단 이곳저곳을 살피는 일이 반복됐다. 요사채가 있기는 하나 불자들이 와도 잠시 다리를 걸뜨리고 앉을만한 공간도 없었다.

낙조-진달래, 포교 도우미로 활용

그러나 이만한 사격이라도 자족하면서 잘 가꾸어 불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도량으로 가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진하고 있을 즈음 이번엔 수마가 적석사를 할퀴었다. “비록 외격은 허술하나 내용만은 여법한 도량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겠다”는 원력으로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마다 실천해 온 철야정진이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1998년 8월, 대홍수는 근근이 명맥만 이어오던 적석사를 완전히 휩쓸고 지나갔다. 절망적이었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유실되고 진입로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적석사의 미래는 흘러내리는 흙빛 토사와도 같이 칙칙하기만 했다.

‘불자들에게 행복을 주는 도량, 편안함을 주는 도량을 만들겠노라’며 주지 소임을 맡지 않았던가, 선암 스님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정진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얻었다 한들 본래 있었던 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었던 것”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수연낙명’(隨緣樂命, ‘닥쳐온 모든 일들이 나에게 인연이 되는 일이니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뜻)하고 순간순간 오직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를 담은 스님만의 발원문이었다. 안으로는 기도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 토요 철야 정진을 재개했다. 선암 스님은 전통 사찰인 적석사의 복원 기금을 지원받기 위해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와 정부 관련 부처, 지방자치단체를 순례하며 발품을 팔았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면 아침 예불 후 도량 곳곳을 돌아다니며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냈다. 1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불사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도량 정비 불사는 더디고 지난했다. 다시 산문을 열었다는 말이 정확할 듯하다.

“불사의 시작이라, 수해가 나서 부처님 복장을 살펴보게 됐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순간 화도 났으나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300여명의 불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지요. 복장에 넣을 복장물 불사 동참을 안내하는 편지였는데 3개월 동안 1100만원의 정성이 모이더군요.”

대작 불사의 단초였다. 그 정성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다시 해보겠는 힘이 생겼다. 불자들의 정성은 불사를 지탱해 준 버팀목과도 같았다. 불사를 하는 사이, 등록 신도 수라고 해봐야 250세대에 불과했으나 이젠 그 열배인 2500세대로 늘었다.

변변한 요사채 하나 없던 도량에는 해동제일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관음굴(190여㎡)과 그 위층에 봉안한 대웅전(90여㎡), 수선당(주지실), 산신각, 해수관음이 상주하는 낙조대, 식당을 갖춘 요사채, 찻집 염화미소 등 전각들이 고려산 중턱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격도 사격이지만 포교 프로그램으로는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철야기도가 100여명의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거르는 일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해마다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1박 2일 동안 열리는 불씨 나누기, 억새와 진달래 군락을 활용한 문화 포교가 계절마다 펼쳐지고 있다.

선암 스님과 강화 지역 불자들은 이러한 적석사의 변화를 ‘경천동지할 일’(기적)에 견주고 있다. 그러나 기적이라고 표현 할 뿐 기적이 아니다. 다만 스님과 적석사 불자들의 정진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암 스님은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호미를 잡고 풀을 맨다. 스님의 법의에 늘 고려산 황토흙이 묻어 있고 황토물이 배어 있는 이유이다. 적석사의 경천동지할 변화의 첫째 동력은 역시 아랫마을 연꽃마을과의 화합이며 대중들의 정진이다.

“10년 불사 동안 단 한 번도 마을 사람들이 민원을 제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초대형 축대를 쌓고 대형 트럭이 오가도 마을 사람들이 불편함을 인내해 주었지요.”

처음 절에 왔을 때 방치된 절이라는 적석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선암 스님은 자주 연꽃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동네 어르신들에게 안부를 묻고 동네 사람들의 애경사를 챙겼다. 그러한 노력은 “적석사도 이젠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고 사찰과 스님을 연꽃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적석사는 마을도 그렇지만 특히 연꽃과 인연이 깊은 도량이며 그 사격 역시 대단했던 절이다. 고구려 장수왕 재위 416년, 천축 조사가 고려산 정상 오련지에 나투어 다섯 송이의 연화를 공중에 날리고 그 중 적연이 떨어진 낙조봉 아래 터를 잡아 적연사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열었다. 적연사는 적석사의 옛 이름으로, 사중 소유의 전답이 강화 전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사격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옛 명성은 옛것일 뿐, 스님은 신도 한명 찾지 않는 사찰을 정진하는 불자들로 가득한 기도도량으로 바꾸기 위해 적석사 주변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1999년 12월 31일 묵은 천년의 해를 보내고 새천년의 해를 맞이하는 밀레니엄 축제를 열었고 3년 전부터는 강화 마니산이 성화를 채취하는 불(火)의 성지라는 지역적 특성을 살려 해넘이, 해맞이 축제를 불씨 나누기로 전환해 실시하고 있다. 새해의 희망을 담은 불씨(촛불) 나누기는 고려산 낙조대의 맑고 밝은 불씨를 각 가정에 밝혀 가정이 화목하고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기도 운동으로, 적석사는 불씨를 각 가정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용기를 제작해 보시하고 있다. 불씨 나누기에는 해마다 3000여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고려산을 대표하는 식물로는 진달래와 억새 군락이 있다. 해마다 4~5월이면 적석사에서 고려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 3㎞ 구간에서 꽃을 피우는 고려산 진달래는 산 전체를 진분홍으로 바꿀 만큼 많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가을 억새는 적석사를 황금빛으로 수놓는다. 적석사는 두 식물을 적석사를 알리는 홍보 도우미로 활용하고 있다. 하루 인파가 2만여명 이상 몰리는 바람에 자연 훼손 등을 이유로 지금은 중단했으나 5년 전만하더라도 진달래 축제를 열어 도량을 알렸고 억새 군락 등산로는 맨발 걷기를 위한 포행코스로 개발, 정진의 길로 이용하고 있다.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철야 정진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라는 말이 있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다는 뜻이다. 적석사와 같이 불사에 입재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과 노력이 한결 같을 때 쓰는 말이리라. “10년 후 강화를 대표하는 선 수행 도량으로 거듭나겠다”는 발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적석사의 2차 불사는 지금껏 그랬듯이 다반향초의 마음으로 정진한다면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불사 동참 032)932-6191
 
강화=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마을 등지고 포교도, 불사도 없다”
고려산 적석사 주지 선 암 스님

“가끔 정부의 교부세를 받아 추진하던 전통 사찰의 복원불사와 관련,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자들과 함께 불사에 최선을 다해도 부족할 판인데 딴 생각이라뇨….”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지원받은 재정에 대한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고 묻자, 고려산 적석사 주지 선암 스님〈사진〉이 보인 반응이다. 지난 10여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사에 불사를 거듭한 끝에 이제 겨우 여법한 도량으로서의 사격을 갖추게 됐는데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했다는 것. 스님은 “‘정부의 불사 지원을 계기로 불자들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불사를 할까’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사를 해 왔다”며 “다만 그러한 소식으로 전통 사찰과 한국 불교 전체의 이미지가 훼손될까 걱정스럽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늘 불사와 포교에 대해 고민한다. 고려산 자락에 피어나는 진달래꽃도, 적석사를 병풍처럼 휘감고 있는 억새 군락도, 대웅전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600여년 된 ‘부부 느티나무’도 스님의 이런 고민을 통해 불자들을 적석사로 이끄는 포교 프로그램의 소재로 거듭난다.

“사찰의 개산 당시 명성만으로 지금의 불자들을,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사지가 왜 있겠습니까. 불자들이 찾지 않기 때문에, 죽은 터를 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스님은 적석사가 연꽃과 인연이 깊다는 역사적 기록에 따라 붉은 연꽃을 심어 놓은 수조를 경내 곳곳에 자연스레 장엄했다. 도량의 터전이라고 해봐야 1000여㎡도 안 되던 것을 10000여㎡ 이상으로 넓히고 초대형 축대를 쌓는 대규모 불사를 시행했음에도 연꽃마을 주민들은 흔쾌히 불편함을 참아 주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선암 스님은 “마을을 지날 때면 차에서 내려 동네 어르신들에게 건강을 묻고 머리를 숙이며 하심(下心)을 하니, 그리 됐다”며 짧게 답했다. 사찰과 스님이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불사도, 포교도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루 50명 정진하는 강화 대표도량
10년 후 우리절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지는 해의 빛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낙조대는 적석사의 야외기도 법석이기도 하다. 적석사는 이곳을 자연석으로 장엄해 기도터(보타전)를 닦고 기도터 상단에는 지금의 해수 관음상을 1.8m 높이의 석조 관세음보살좌상으로 교체, 봉안한다. 적석사의 보타전 건립불사는 관음기도 도량으로서의 사격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석사는 이미 보타전 정비 불사를 위해 강화군으로부터 5억원의 예산을 확보한 상태이며 관세음보살좌상 조성은 불자들과 십시일반 보시운동을 펼쳐 회향한다.

적석사가 10년 내 신축해야 할 요사채와 법당은 주지실인 수선당과 부용당(90여㎡), 향로전(90여㎡) 등이다. 적석사의 10년 후 청사진은 바로 신축 불사 회향과 함께 그릴 수 있다.

선암 스님은 “이런 건물들이 완공되면 경내에서 산사음악회 등 최고의 문화법석을 봉행하게 될 것”이라며 “하루 50여명 이상의 불자들이 상주하면서 수행, 정진하는 기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강화 최고의 시민 선 센터를 상설, 운영해 선을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게 청사진의 핵심이다. 

남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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