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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

기자명 법보신문

총독부 의도로 탄생된 불교계 최초 통합 재단법인

전국에 분산된 30본산, 일원화 꾀한 일제의 의도로 탄생
자주적 조직인 총무원과 대립…교단 재산보호는 긍정적

<사진설명>1924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1920년대 초반 불교계는 30조각으로 분산된 30본산 체제를 극복하고, 하나의 통일된 기관을 만들어 역량을 결집시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통일기관 설립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불교계의 통일기관 형성의 움직임은 총독부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이후 1919년 8월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문서 가운데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안」 중의 ‘종교적 사회운동’에서 불교계의 민족운동 대처 방안으로 6개 항목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사찰령을 개정하여 경성에 30본산을 총괄하는 총본산을 세우고 중앙집권화를 꾀한다. 둘째 총본산의 관장은 친일파를 세운다. 셋째 불교진흥촉진단체를 만들어 총본산 옹호기관 노릇을 하게 한다. 넷째 진흥촉진 단체는 본부를 경성에 두고 회장은 거사 가운데 친일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은 사람을 세운다. 다섯째 이 단체의 사업은 일반인의 교화·죄인의 감화·자선사업 등과 기타로 한다. 여섯째 총본산과 각 본산 그리고 불교단체의 상담역은 인격이 있는 일본인으로 한다. 이 문서에 보이는 것처럼 총독부는 불교계에 통일기관을 세워서 통치에 효율성으로 도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불교계 내부에서도 통일기관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21년 12월경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내년 초에 열리는 30본산 주지 총회에 불교계에서 혁신되어야 할 사항들을 건의하기 위하여 조선불교유신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22년 1월 6일에 개최된 30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주지 총회의 명칭을 ‘조선불교도 총회’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투표에 붙여져 참석한 주지 24명 중 찬성 13명, 반대 11명으로 가결되었다. 조선불교도총회는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하고 통일기관이 설립될 때까지 임시기구로서 총무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조선불교도총회에서는 총무원 임시원장으로 전주 위봉사 주지 곽법경을 선출하고, 이무부장(理務部長)에는 오성월, 서무부장은 이회광, 그리고 부원으로는 유석규·황경운·임석진·김지현 등을 선임하였다. 임시총무원은 7명으로 구성된 의사회를 두어 전체적인 운영을 맡기로 하였다. 1월 12일에 속개된 조선불교도 총회에서 자주적인 발언들이 오고가자 느닷없이 총독부 학무국의 국장과 과장이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방청을 금지시키고 비밀리에 어떤 지시를 내렸다. 시바다(柴田) 학무국장은 “유신회가 제기한 일련의 개혁안과 조선불교도총회의 결의 사항에 대해서 둘 다 모두 사사로이 회의를 열어 결정한 사안이므로 당국에서는 간섭하지 않겠다. 그러나 주지총회는 법령으로 인정한 기구이므로 방해하는 일이 있으면 경찰권을 발동하여 통제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통도사 승려 강신창은 회의장이 살벌하게 된 것에 대해서 본사 주지들이 총독부의 관권을 빌려서 유신회원을 압박하고 불교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는 결의를 하였다고 비분강개한 말로 공격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본사 주지들은 관권을 빌려서 유신회를 압박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유신회의 공격으로 회를 정리할 수 없어서 총독부에 가서 회의를 진행할 수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학무국 간부가 자진하여 나온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후 본사 주지들 사이에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결국 통도사·범어사·해인사·석왕사·백양사·위봉사·봉선사·송광사·기림사·건봉사 등 10본사만으로 총무원이 구성되었다.

총무원의 자주적인 움직임을 주시하던 학무국은 1922년 5월 24일 30본산 주지 총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회의에 참석한 26본사 주지들에게 종래 30본산연합제도를 폐지하고, 10본사에서 설립한 총무원도 폐지하여 새로운 통일기관을 세워 불교사업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30본사 주지들은 총독부의 지시대로 5월 27일 총회를 열었다. 총독부로부터 총무원을 폐지하고 불교계를 총괄할 수 있는 새로운 대표기관을 만들라는 지침를 받은 30본사 주지들이 개최한 총회는 반대파의 참여가 봉쇄된 채 진행되었다.

30본사 주지들은 중앙기관 설립문제를 토의한 결과 경성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전임이사 5명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는 불교사업 경영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문제를 토의하였다. 동년 10월 15일에 총무원을 운영하던 10개 본사 가운데 7개 사찰은 교무원 측으로 전향하고 통도사·범어사·석왕사는 끝까지 총무원을 지켰으나 김용사 주지 김혜옹 등 27개 본산 주지들은 교무원의 재단법인 설립을 총독부에 신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이 당시 총무원과 교무원은 수송동에 있는 각황사에 나란히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교무원측은 대다수 본산이 연합하여 재단법인 승인까지 받은 상태이므로 각황사는 교무원이 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총무원은 각황사에서 퇴거하라는 통고를 하였다. 그러자 총무원 측은 각황사를 건립할 때 총무원측 본사도 비용을 부담하였으므로 나갈 수 없다고 맞섰다. 급기야 1923년 2월 24일 교무원측과 총무원측 승려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일부 승려들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다음 날 교무원측이 총무원의 간판을 떼어내 도끼로 깨어버렸다. 이에 총무원 측도 교무원 간판을 깨뜨려 버렸다. 사건은 급기야 법정의 명도소송으로 번졌고, 판결은 총무원 사무실이 교무원 소유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기각한다고 내려졌다. 교계의 사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속 법정소송으로 확대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총독부의 조종을 받아 성립된 교무원에 자주적 성격을 띠고 출범한 세 본사 즉, 통도사·범어사·석왕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교무원에 참여한 본사들도 대중 승려들의 의사를 결집한 것이 아니고 주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통도사의 경우를 살펴보면 1922년 연말 마산 포교당에서 개최된 본말사 주지 총회에 청년 승려 45명이 참석하였다. 경남도청에서는 학무과장이 출석하여 재단법인 교무원에 가입하기를 권유하였다. 청년들은 몇몇 승려의 야심으로 성립한 재단법인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교무원의 재단법인 성립을 부인할 것을 결의하고 즉석에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결의문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2년 5월에 많은 조선 승려들이 모여서 개최한 조선불교도 총회를 무시하고, 몇몇 주지들은 학무국과 경관의 입회 아래서 재단법인을 조직하였다. 교무원 당국자가 인격이 있어 일을 하여 나갈 여망이 있으면 일반 교도의 여망을 무시한 죄는 용서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간부들 가운데는 십여년 동안 사사로운 권리만 경쟁하고, 시기 질투와 음란만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고 성토하였다. 청년 승려들은 연대책임이 있는 일을 자신들의 방청까지 금지하고 이루어진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교무원에 참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사진설명>총무원과 교무원의 간판 부착 문제로 시비가 일어 난투극이 벌어지고 급기야 법정소송으로 비화한 사실을 보도한 1923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이와 유사한 사례는 유점사·석왕사 등의 사찰에서도 발생하였다. 결국 총무원은 총독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24년 4월 3일 교무원에 흡수됨으로써 30본산 통합이 이루어졌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종래 운영해오던 동광고등보통학교와 천도교 측으로부터 인수한 보성학교를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1922년에 강제 폐교되었던 중앙학림을 전문학교로 승격시켜 운영하였다. 그리고 권상로로 하여금 『불교』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게 하였다.

총독부는 불교계의 총의를 수렴하여 성립된 총무원을 본산 주지들을 사주하여 교무원이라는 반대 세력을 만들어 무력화시키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성립시켰다.

재단법인은 재정지출과 연말 결산 사항을 매년 총독부에 보고해야 함으로 합법적인 통제가 가능하였다. 불교계는 교단의 재산을 보전할 수 있고, 나아가서 대외적인 신인도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법인화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불교계에 30본산이 참여하는 재단법인이 성립된 것은 강압 일변도의 통치방식에서 보다 세련되고,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결국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불교도들의 여망을 무시한 채 총독부의 통치방침에 순응한 산물로 탄생된 것이다. 이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행보는 친일의 노선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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