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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923년 자재암서 비구계 수지

기자명 법보신문

화상이 “중도 잃지 마라” 당부
운허·성호에게 북경유학 알려

<사진설명>운암 김성숙은 1923년 경기도 양주군 소요산 자재암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진은 당시 받았던 계첩.

월초 화상은 성숙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의 침묵을 깬 이는 월초 화상이었다. “그렇다면 네 가슴속에서 그토록 용솟음치고 있는 그 뜨거운 용암을 한 번 원 없이 분출해 보거라. 하지만 성숙아 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라는 점은 잊지 마라. 언제 어디서나 중도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고, 항상 백성의 편에서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화상의 눈가에는 비칠 듯 말 듯한 물기가 고였다. 어떻게 해서든 성숙이 승려의 길을 걸으며 불교와 대중들을 위해 일하도록 하고 싶었으나 결국 젊은 가슴에 지펴진 불을 끄지 못했다는 회한이기도 했고,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을 험난한 길로 들어서는 제자를 보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특별하게 아끼던 손 상좌를 보내기로 결심한 화상은 성숙이 떠나기 전에 평생을 간직할 선물이자 경책을 주기로 했다. 1923년 4월 8일. 화상은 성숙을 경기도 양주군 소요산 자재암으로 불렀다. 이날 자재암 금강계단에서 성일 화상을 전계대화상으로 한 수계식이 열렸던 것이다. 성숙은 이곳에서 수계제자로 단 아래에 섰고, 수계식의 존증아사리로 단에 오른 월초 화상은 이제 막 비구계를 받아 영원히 승려의 신분을 갖게 될 제자를 애틋하고 대견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알았을까. 성숙은 이 계첩을 소중히 간직했고, 훗날 처음 삭발수계하고 받았던 도첩과 사미과 수료증서 그리고 이날 받은 계첩을 후손들에게 전해 오늘까지 전할 수 있게 했다.

비구계를 받은 성숙은 조용하게 그러나 빠르게 북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일본 경찰들이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성숙을 항시 감시하고 있던 터라, 산문을 나설 때마다 따라붙는 그들을 따돌릴 계획도 따로 세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성숙은 봉선사 뒷산 약수터에서 다시 운허를 만났다. 성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님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방도를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운허 역시 때가 되었음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래 북경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잡을 생각이오”하고 운허가 걱정스레 묻자, 성숙은 “일본 경찰 눈을 피하자면 금강산을 거쳐서 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계획을 설명했다. 둘은 이제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숙은 다음날 성호를 만났다. 이제는 출가해서 능허 스님이 된 성호 역시 본가에 처가 있었다. 그러니 가끔은 집안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것이 불경공부에 매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능허의 그런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던 성숙은 “속가의 가족들은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 공부에 전념하라”고 다독였다. 그리고 머지 않아 북경으로 떠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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