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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16. 사성제와 팔정도②-광덕의 ‘원왕생가’

기자명 법보신문

정토발원 짚신꾼 달 붙잡고 호소하네

<사진설명>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삼존판불은 화려한 신라의 미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토왕생을 발원했던 신라인들의 기원은 솔직하고도 소박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우리들 삶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과 같다. 그 찰나의 순간, 덧없이 사는 삶이기에 서럽고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들 생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좀더 달콤한 향락을 맛보고자 우리의 욕망은 이글거린다. 그 불을 재조차 남김없이 소멸시키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달아 이제/서방 거쳐 가시리잇고/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여쭙는 말씀 함씬 사뢰소서//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두 손 모아 합장하옵고/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아, 아 ! 이 몸 남겨두고/48대원(大願) 이루실고.

신라 문무왕(文武王: 661-681)대에 신을 삼은 것을 업으로 삼은 광덕과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던 엄장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수행 정진한다. 정진 중에 그가 정토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원왕생가’이다.

양인 광덕은 달을 통하여 정토왕생의 염원을 빈다. 속된 자신이 감히 무량수불께 직접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서방정토가 있는 서쪽으로 가는 달을 중개자로 삼아 자신의 소망을 전달해 달라 이른다.

그러나 전달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 무량수불께 전달된다고 할 때 다음의 문제는 자신의 격이다. 말을 전달하는 것은 달의 임무이지만 그것을 듣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처님의 영역이다. 무량수불은 그 수명이 한량없고 그 광명도 또한 십만 세계를 두루 비치어 끝이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지은 것으로 음역하여 아미타불이라 한다. 아미타불은 사바세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서원 밖에 버려 둔 채 자신만의 깨달음만을 취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맹세하고 발원한 부처이다. 그러니 ‘다짐 깊으신 부처님’이다.

또 이 다짐 깊으신 부처님의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과 태도다. 정토사상은 자기 스스로 어려운 수행을 통하여 성불하는 난행도(難行道)가 아니라 남의 힘으로도 쉽게 부처에 이를 수 있는 이행도(易行道)이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아미타불의 도움에 의해 정토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 정토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신앙심으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아미타불의 대비와 원력에 의하여 모든 죄가 소멸하고 서방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나서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신앙이다. 곧 왕생의 타력은 아미타불이며, 아미타불은 진실한 마음으로 왕생을 염원하는 이를 돕는다. 그러니 광덕은 자기의 불심과 수행실천을 내보이고자 “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두 손 모아 합장하옵고 왕생극락하기를 그리는 이 있다.”는 것 또한 전해달라고 간절히 기구하고 있는 것이다.

“날 두고 어찌 보살” 협박?

그리 기구해 놓고도 광덕은 무언가 불안하였던 모양이다. 부처님을 믿지 못함이 아니다. 극락왕생이란 것이 너무도 지고한 이상이기에 조바심이 난 것일까? 광덕은 아미타불을 향하여 감히 “나를 왕생시키지 않고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부처님 앞에서 세운 48가지 소원인 사십팔대원을 이룰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 진술은 달이 듣고 있음을 전제한 독백이다. 또 그 달이 자신의 말을 아미타불께 전하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두 대상에게 하는 말은 다분히 위협의 모습을 띠고 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 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고대 사회의 언령신앙(言靈信仰)이 담겨있다. 자기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주술을 걸고 있다. 아미타불이 이 소리를 들으셨다면 어찌하셨을까? 아마도 빙그레 웃으셨으리라. 투박하나, 너무도 지극한 정성으로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한 평범한 신라인의 소리가 그대로 배어있기에.

마침내 광덕은 10여년을 아내와 동거하면서도 관계를 갖기는커녕 누워 자지도 않은 채 수행에 힘써 마침내 성불한다. 약속대로 광덕은 부처가 되어 친구 엄장에게 나타나 “나는 이제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시게.”라 한다.

투박해도 진솔한 신라의 노래

다음날 광덕의 거처를 찾아가니 과연 광덕이 죽어 있었다. 이에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치렀다. 장사를 다 마치고 얼마가 지난 후 광덕의 아내에게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저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처가 “그러시죠.”라고 대답하였다. 곧 밤이 되어 정을 통하려 했는데, 광덕의 처는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재차 강요하니 “이러고도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가히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 한다. 엄장이 놀라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굳이 안 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제 남편은 같이 산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하룻밤에 한자리에서 잔 적이 없소. 더군다나 내 몸을 건드리기야 하였겠소? 그저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만 외었소. 혹은 16관법을 하여서 그것이 이루어져,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오면 때로는 그 빛에 올라 정좌하고 앉았었습니다. 정성을 이만큼 쏟았는데 서방정토로 아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 리를 가는 자는 첫걸음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태도는 동으로 간다 하면 갈지 몰라도 서방정토로 간다는 것은 당치도 않소.” 이 말을 듣고 엄장은 너무도 부끄러웠다. 엄장은 뼈를 깎는 아픔으로 원효의 쟁관법대로 수행하여 친구의 뒤를 좇을 수 있었다.

고가 일어나는 원인을 총괄하여 집(集)이라 한다. 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눈병이 나면 하늘에 없는 꽃이 보이듯 어리석음과 무지에 휩싸여 허상을 진여라고 착각하는 무명(無明)에 있다.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를 보면, 주인공은 아내와 동생이 방 안에 든 쥐를 잡느라고 옷매무새가 단정치 못한 것을 보고 둘이 간통한 것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내쫓는다. 이에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집을 떠난다. 그 후에야 주인공은 잘못을 깨닫고 처절한 마음으로 배따라기를 부르며 동생을 찾아 세상을 떠돈다. 주인공뿐이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무명에 휩싸여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우리 자신도 고통스런 삶을 이어간다. 12인연으로 인하여 사람의 삶은 끊임없이 고통뿐이다. 계속 태어나고 죽으면서 윤회가 반복되고 윤회로 인하여 거듭되는 삶은 삶마다 고통이다.

그 고통을 멸하는 길이 바로 7과(七果) 37도품(道品)이다. 그 중 8정도는 이의 요체이다. 올바로 보고(正見) 올바로 사유하며(正思惟) 순수하고 깨끗한 말만 진실되게 구사하며(正語) 부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행위와 생활만을 하며(正業, 正命) 일체의 나쁜 마음을 끊어버리고 선을 닦아(正精進) 진리를 명확하게 터득하여(正念) 지혜로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여 선정을 올바로 하면(正定) 해탈을 이루게 된다.

닦고 또 닦아 노비도 성불

앞의 ‘풍요’에서 “서럽더라”가 고(苦)라면, 그를 낳는 원인인 “오다”가 집(集)이다. 다투어 진흙을 나르며 영묘사를 짓고 장육존상을 조성하는 것, 곧 “공덕 닦으러”가 도(道)라면 그리하여 공덕을 이루는 것, 곧 마지막 구의 “오다”가 멸(滅)이다. 광덕에게 양인 신분의 삶이 고라면, 그를 낳는 원인인 집착과 무명이 집이다. 아내와 같이 살면서도 살조차 닿지 않은 채 10여 년을 오로지 수행정진에만 몰두하는 것이 도라면, 마침내 해탈하여 극락 왕생을 이룬 것이 멸이다.

이처럼 상락아정(常樂我靜)한 세계는 절로 오지 않는다. 올바르고 올곧은 마음으로 세상과 사물과 타자를 바라보고 오직 진실된 말만 하고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계율이 오히려 자유라 생각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만 행동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터득하고 궁극의 깨달음을 향하여 내 삶을 끊임없이 갈고 또 갈고 닦으며 선정하는 자, 그의 길이 해탈의 길이다. 신라 경덕왕 대에 욱면은 노비 신분에 지나지 않음에도 바로 이렇게 하여 부처가 되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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