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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두부와 배추와 통닭과 맥주

기자명 법보신문

『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소설집 / 소나무

“임(林)의 집에 두부 한 근이 상했다.”

어느 집이나 두부가 상해 버려지는 것은 다반사일 텐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금야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해오던 중국, 천지개벽이라도 이루어졌는지 높은 빌딩이 쑥쑥 올라가고 몇 개 도시에 돈이 돌자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맨질맨질 기름이 칠해져 갑니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누구라도 돈을 벌고 상류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시절이 왔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시절이 온 줄은 알겠는데 이게 또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온갖 연(緣)의 씨실날실이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입니다. 배경 없고 돈 없는 서민들이 그런 세상에서 온전히 제 밥그릇 하나 차지하려면 그 뒤엉킨 연줄의 실마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제대로 찾기만 하면 그걸 잡고 세상의 중심으로 비비고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상경하여 대학을 나온 주인공은 도시 출신의 여자와 아름답고 소박한 연애 끝에 결혼합니다. 처음에야 그들도 나름대로 꿈을 품었을 테지요.

‘좁은 아파트라도 얻어서 아이를 낳고 반듯한 교육을 시키고 그렇게 살림을 늘려가면서 부부는 고상하고 세련되고 여유롭게 늙어간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 이건 아무리 잘 빨아놓아도 금세 퀴퀴한 냄새 풍기는 장마철 행주 같은 거라서 젊은 부부의 삶은 금방 구려지기 시작합니다.

한때의 웅대한 이상? 자존심?

“그게 밥을 먹여주지도 집을 넓혀주지도 않는데, 큰 뜻이 있으면 어쩔 거고, 설사 꿈이 있다면 또 어쩌겠다는 것이냐”며 주인공은 강변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맞추며 살다보니 그 무엇보다도 상한 두부 한 모에 열 받고, 열 살짜리 가정부의 부정에 심사가 뒤틀리는 소시민이 되어버렸습니다. 순수하던 아내는 수도검침원을 속이며 수돗물을 훔치다 들키기까지 했고, “고향 사람들이란 긴 꼬리 같아서, 언제나 흔들면 남 보기에 창피했고, 또한 자기가 여전히 촌놈임을 잊지 않게 해주기에” 옛정을 들먹이며 찾아오는 고향의 지인들이 어느 사이 부담스러워지기까지 되었습니다.

문득 깊은 자괴감에 빠져 한밤중에 깨어나기도 하지만 적당히 뇌물을 주고 굽실거리며 살다보니 어느 사이 자기도 누군가에게 뇌물을 받고 사정을 봐주게 되었습니다. 허허, 그것 참!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다보면 이런 날도 오게 되는 법이지요.

푸대접하고 돌려보낸 고향은사의 사망소식에 잠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더 생각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를 달랩니다. 산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싼 값에 배추를 사들여야 하고, 그러면 저녁에는 뇌물로 받은 전자레인지로 아내는 통닭을 요리해서 맥주와 함께 그에게 내어줄 테고, 그게 인생일 테니 그가 불만할 일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호기 넘치게 덤벼들다가 세상을 따라 쪼그라들고만, 참 슬픈 당신과 나의 자화상입니다.
 
동국대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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