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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17. 저승과 극락①-정지용의 ‘향수’

기자명 법보신문

지친 몸은 고향이 고된 삶은 극락이 그립다, 고대한다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한 번 가면 누구든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극락이다. 육신을 이고 가서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곳이 고향이라면, 영혼이 비상하여 영혼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곳이 극락이다”

<사진설명>진정 고향이 그리운 이유는 그곳에 어린시절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대한민국불교사진연합회 허건영 회원의 작품 ‘동자승의 나들이’.

현대인의 삶의 소외와 고독의 연속이다. 우리 집 창으로 관악의 푸른 능선이 보이고 집 안에 아내가 한 달 이상을 걸려 한 땀 한 땀 수놓은 전통 보자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어느 동네의 몇 평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듯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하면서 우리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가지는 고유의 품격보다는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로 평가한다. 그러니 모든 것을 그 가치에 견주어 값어치를 매긴다. 그러니 사람마저 교환되는 물질처럼 여기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서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니 모두가 고독하고 불안하다. 고독과 불안과 소외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무엇엔가 지칠수록, 삶이 고단할수록,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멀다고 느낄수록 간절히 그를 그린다. 그것은 이상향이기도 하고 이승 너머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가갈 수 것은 바로 고향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안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하늘에 석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현실 속의 이상향 ‘고향’

대중가요로도 너무도 유명한 정지용 시인의 ‘향수’이다. 고향, 목가적인 전원, 유토피아를 노래한 시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그 시들 가운데 대부분이 서구적 시어로 서구의 이미지가 강한 시골과 전원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토박이말로 질박한 충청도 시골의 흙냄새 짙은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깊이 해석하기보다 이미지를 떠올리면 족하다. 야트막하나 품이 넉넉한 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준 앞으론 너른 들이 펼쳐져 있고 그 끝 편으로 걸어가 개울가를 거닐면 새록새록 헤엄치고 물고기를 잡고 썰매를 타며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오르게 하는 실개천이 고샅을 벗어나 산기슭을 타고 논길을 돌아 버들개지를 품고서 졸졸 흐른다. 그 들에 해가 떨어져 저녁놀이 금빛으로 곱게 물들면 집집엔 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얼룩박이 황소가 “움-메---” 하고 길게 울음을 운다. 게으른 아이가 이제 외양간으로 데려가 달라는 듯.

겨울날 밤 질화로에 모여 앉아 밤이든 고구마든 구워 호호 불며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소변을 보러 문을 열면 텅 빈 밭으로 밤바람 소리가 잉잉거리며 방 안 가득 들어온다. 비스듬히 누워서 듣다가 얕은 졸음에 빠진 늙은 아버지는 한숨 푹 자고 싶지만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랴 잠을 참느라 짚 베개를 돋아 고이고는 눈을 크게 떠본다.

흙을 밟고 뒹굴며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을 가슴 가득 품으며 한껏 꿈을 키웠었는데…. 이제 아득히 고향과 먼 곳에 있으니 그 새파란 하늘이 그립고 대나무를 썩썩 잘라 활을 만들어 누가 더 멀리 쏘나 내기를 하며 날린 화살을 찾으러 풀숲을 뒤지다 풀섶 이슬에 바지를 함빡 적시던 그때 그 동무들이 눈에 밟힌다.

전설과 신화를 가득 품은 깊고 아름다운 바다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밤물결처럼 검고 숱이 많고 출렁이는 검은 머리를 날리는 어린 누이, 예쁘지도 않지만 볼수록 정이 새록새록 드는 얼굴을 하고서 아무런 치장도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사철을 발 벗고 지내는 질박하고 순수한 모습의 아내가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이삭을 줍던 곳이 그곳.

하늘에 별이 가득 떠오르면 별을 헤며 누구인가 지어놓은 모래성을 거닐며 밤바다를 거닐다 들어와 서리 내릴 무렵 까마귀 우짖고 지나가는 초가지붕 아래 흐릿한 호롱 불빛 아래 모여 앉아 도란도란 밤새 이야기를 속삭이던 그곳. 바로 그곳을 어찌 차마 꿈엔들 잊을 리가 있겠는가?

한국인이면 누구나가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전형적인 한국적 향토의 서정이 물씬 품기는 시이다. 그러기에 이 시를 읽으며 사람들은 충청도가 고향이 아니라도 그런 고향, 곧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당하지 않은 채 사람과 공존하고 그 자연 아래 순수함과 질박함을 갖춘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는 곳, 서로 상부상조하며 노동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나의 아픔이 그들의 아픔이고 그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그곳을 갈망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없어도 좋다. 어머니 하나면 족하다. 그곳은 바로 어머니, 어머니가 있는 곳이다. 모든 것을 잃어 돈 한 푼 없어도, 친하던 친구마저 돌아서 배신감에 불탈 때도, 병이 깊어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때에도 잔잔히 웃으시며 품어주시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러기에 도시에 묻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고 험담하고 밤낮을 질주하며 살수록 그곳에 가고 싶다. 순박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할수록 고운 이들과 만나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향을, 도시와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과 질박함을 그린다.

희망 없는 곳의 희망 ‘극락’

하지만 우리가 고향에서 진정으로 그리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도, 해마다 풍성한 수확을 안겨주는 기름진 논밭도, 편안히 쉬게 하는 집도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어머니와 동무들, 형제와 친척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설키며 만든 기억들이다. 빛이 바랜 문풍지에도, 윤기 흐르는 마루에도, 허물어질 듯한 돌담길에도 다가가 스치기만 하면 기억의 편린들이 놀란 참새처럼 날아오른다.

고향처럼, 육체가 소멸된 뒤에 가고자 원망하는 곳이 바로 극락이다. 살아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광덕이 그랬듯 죽어서 가길 꿈꾸는 곳이 극락이다.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한 번 가면 누구든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극락이다. 육신을 이고 가서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곳이 고향이라면, 영혼이 비상하여 영혼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곳이 극락이다. 고향엔 부족한 것이 있지만 극락은 완벽한 자유와 행복의 터전이다. 고향엔 누구나 갈 수 있다. 극락엔 누구나 갈 수 없다. 고향은 언제인가 끝이 있지만 극락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극락을 고대한다. 현실의 삶이 불행할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극락을 그린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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