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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18. 극락②-충지 스님의 선시

기자명 법보신문

눈 돌려 보니 나그네 발 밑이 극락일세

내가 이미 불성을 품고 있으니 티끌만 거두어 버리면 청정한 하늘이 보이듯 무명에서 벗어나면 곧 바로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다.

<사진설명>캄보디아의 앙코르유적은 옛 사람들이 상상하던 수미산 위의 극락을 지상 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향가 기행을 떠나자는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경주 남산을 찾았다. 용장골 어디쯤으로 기억한다. 호젓하게 완상하자는 욕심으로 일행을 저만치 따돌리고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찾았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선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불상 앞에 처음 섰을 때보다 더한 감동에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거기 너무도 푸른 하늘이 바위를 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푸름을 한껏 더 드러내려 함인가? 새털구름 몇 조각이 능숙한 화가의 화룡점정처럼 하늘이 만든 여백미를 한껏 드러내는 완벽한 자리에, 고려청자의 상감 문양처럼 자신의 때깔을 죽여 바탕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바람에 하늘은 끝 간 데 없이 그윽한 깊이마저 담고 있었다. 문득 도솔천이 있다면 바로 저 하늘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모르게 고려 말 승려인 충지(止)의 선시가 떠올랐다.

고향의 집안 일 날로 황량해 가고/나그네 속세에서 갈 길 멀어라/마음 따라 눈 돌려 사알짝 보면/그 발 밑 서 있는 곳 바로 내 고향

문득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인연이 있는 스님이 『화엄경』을 강독한 것도 아닌데 티 없이 청정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잎 두 잎 꽃비는 내려 너의 가슴 물들이고 나의 마음 수놓더니 와, 당, 탕, 탕! 골짜기를 내리쳐 서라벌을 뒤덮는다. 꽃향기가 세상을 덮으니 몇 잎은 소리로 변하여 천상의 음악을 울리고, 또 몇 잎은 빛으로 변하여 무지개를 놓으니 선녀들이 생황을 불며 비파를 타며 내려온다. 음악과 향기와 빛이 한데 어우러져 중중무진의 세계를 만드는데 거기 미륵보살이 계셨다. 제자들의 날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중생이 구하는 고향 ‘불국토’

고려 말 선승 충지(止: 1226-1292)의 선시 ‘이행검의 시에 답하며(答李公行儉)’이다.(『園監錄』, 「原集」) 고향을 세속의 태어난 곳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나 불교적 맥락에서 읽으면 고향은 중생이 갈망하는 고향인 불국토, 중생이 돌아가고자 하는 궁극적 처소인 진여(眞如)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니 나그네는 자연 불난 집(火宅)에서 진리를 찾지 못한 채 무명(無明)에 휩싸여 고통스런 방황을 되풀이하고 있는 중생들이다.

경전을 보면, 극락정토는 어떤 옷이나 음식, 향수, 비단 장식품, 오묘한 음악소리, 거처하는 집, 궁전이나 누각들이 갖가지 모양과 빛깔, 크기로 갖추어져 있고, 한 두 가지의 보배 또는 무한한 양의 보배라도 원하기만 하면 생각대로 내 앞에 나타나는 곳이다. 연화장은 불국토 가운데서도 최상의 곳으로 수미산의 무수한 풍륜(風輪)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가장 아래의 풍륜은 위의 모든 보염(寶焰)을 받치고 있고 가장 위의 풍륜은 향수해(香水海)를 받치고 있다. 향수해에는 큰 연꽃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금강윤산(金剛輪山)이 둘러서 있다. 연화장 세계에는 무한한 향수해가 있는데 각 향수해마다 큰 연꽃이 있으며 큰 연꽃마다 모두 무한한 세계를 감싸고 있다. 이런 곳이기에 누구나 그곳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 방황할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불성을 품고 있으니 티끌만 거두어 버리면 청정한 하늘이 보이듯 무명에서 벗어나면 곧 바로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다.

진정 불국토는, 낙원은 있는가? 시대마다 사람마다 고향을 그리듯 유토피아를 꿈꾼다. 꿈꾸다 무릉도원이니, 샹그릴라니, 에리훤(erehwon)이니 엘도라니 하며 이를 멀지 않은 곳에 설정한다.

그렇게 고대하였지만 유토피아에 이른 사람이 있는가? 유토피아라면 고통도, 노동도, 죽음도 없이 모든 이들이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그야말로 천년만년 사는 곳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유토피아는 인간 존재가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꿈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인간이 삶을 지속시킬 가치가 있을까? 꿈을 누리기 위해? 이미 진리에 이르렀다면 무엇 하러 번민해야 할까? 이미 찾은 진리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거기 유토피아엔 고통이 없기에 고통을 초탈하여 이루는 깨달음도, 해탈이라는 완전한 자유도 없다. 노동이 없다면 노동을 통하여 자기 앞의 장애를 극복하는 진정한 자기실현도 없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결핍에서 완성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조금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를 하고 잘못도, 죄도 저지르지만, 이를 성찰하면서 완벽한 인간을 향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인간은 이상과 현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영겁의 진동을 하는 존재이다. 삶이란 모자라고 부족한 것에서 완전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향하여 나아감이다. 지치고 패배하고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것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조건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장애를 넘어설 때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며 그 순간 자유로운 것이다.

유토피아는 없다. 유토피아를 향하여 나아감만 존재한다. 유토피아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사람도, 유토피아를 외치는 이들을 망상가라고 공격하며 오직 현실에만 충실하거나 탐닉하는 이들도 삶을, 인간존재이기를 포기하는 자다. 유토피아가 없다면 현실을 비판하고 개선할 여지도 사라진다. 지금 오늘을 성찰하고 나를 버릴 수도 없다. 더 높고 더 나은 것을 향해 모든 것을 던지는 자, 그의 발밑이 바로 불국토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낙원을 고대하지만 이것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다. 내 마음의 티끌만 거두어 내면 내가 앉은 자리가 불국토이다. 내가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을 끊어 버리고 온화한 평정심을 가지면 그 순간 나는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보다 남의 가난과 고통을 먼저 생각하여 그에게 보살행을 행하면 그와 내가 있는 공간이 바로 극락 정토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자연을 벗하여 하나가 되는 순간 그곳이 연화장이 아니겠는가? 일상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이 바로 해탈이다. 그러니 진정 극락은 내 마음에, 내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 있다. 산천이 아름답지 않아도, 자원이 풍족하지 못해도, 사람들이 별로 없어도 누구에게나 고향은 언제든 그립고 언제든 달려가면 평안한 곳이다. 도시, 혹은 성인 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나와 만나는 곳이다. 극락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마음속에든, 누구의 일상이든 극락이 있고 그 극락은 모두가 참 극락이다. “내가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이것 이외에 참 부처가 어디 있을까?” 충지는 ‘한중자경(閑中自慶)’ 이란 선시 또한 남겼다.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물소리 늘 들어도 들을수록 좋다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소리와 빛 가운데 편안함 있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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