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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0. 이타와 자비행②-안도현의 ‘겨울 강가에서’

기자명 법보신문

강은 제 몸 얼려 눈을 보듬었다

“흔히 우리는 자비를 남을 위한 선행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비는 나를 위한 길이다. 자비는 연기에서 비롯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사진설명>모든 중생의 고통을 보듬어 안기 위해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을 펼쳤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왔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의 ‘겨울 강가에서’라는 시의 전문이다. 눈 내리는 강가에서 강이 얼음을 얼리는 것을 구원의 은유로 하여 지은 시이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은유를 ‘의미론적 불협화음의 해결(the resolution of semantic dissonance)’이라고 정의하였다. 양자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상투적 은유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칼바람이 이는 한겨울의 산길을 무작정 걷다가 마주친 동네 할머니의 인정에 끌려 집어들은 찻잔의 따스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눈발들이 강물에 떨어져 녹아 사라지는 것을 시인은 존재의 상실로 보았다. 눈발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형체도 없이 녹아사라지기에 강은 이를 안타까이 여긴다. 그들을 살리려고 이리 저리 뒤척이며 물길을 바꾸어 보았지만 세상 이치를 잘 알지 못하는 눈발들은 계속 물로 떨어져 강물은 고심 끝에 결단을 한다. 자기 몸을 얼려서 그들을 살린다는.

이 시에서 주요 대립구조는 액체와 고체의 대립이다. 고체인 눈과 얼음은 존재의 유지를 뜻하지만, 액체의 물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분법적으로 대립된 각각은 상생을 이루지 못한 채 분열되어 있다.

자비는 남 아닌 나 구하는 길

그래서 ‘눈’은 세파에 휘둘려 자신의 존재를 쉽게 잃어버리는, 아니면 소멸을 맞는 우리 주변의 무엇이어도 좋다. 힘 깨나 쓰는 자들이 얽어놓은 메커니즘에 생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상실당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어도 좋고, 세상 물정을 모른 채 기성세대의 늪에 빠져 순수한 이상과 맑은 영혼을 잃어버리고 함께 물들어가는 우리 청소년이라 해도 좋다.

이 시의 가능성은 눈이 다양한 의미로 확대되는 데 있다. 눈은 ‘인간 존재,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어도 좋고 ‘자연’이나 한국 전통 문화라 해도 좋고, 추상화시켜 ‘도덕’ 등 어떤 긍정적인 가치라도 좋다. 그렇다면 이 수용자가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지배적인 것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가 휴머니즘을 통하여 이 텍스트를 투사한다면, 그는 이 텍스트를 인간 존재, 인간의 존엄성이 눈처럼 사라지는 20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를 안타까워하면서 얼음처럼 누구인가 구원자가 나서서 이를 구원할 것을 갈망한다. 그가 생태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그는 자연이나 생명이 사라짐을 비통해 하면서 이제라도 이를 살릴 것을 추구한다. 그가 한국의 전통문화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자라면, 미국 대중문화의 제국주의적 침략 속에서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문화와 가치를 수호하는 것을 갈구하는 것으로 이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리. 강의 얼림은 자비행이다. 자비란 이 세상 모든 중생의 고통을 슬프게 여기고 이를 자신이 보듬어 안으려는 것이다. 천수대비, 관세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보살로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이다. 이 보살은 아승지겁 이전에 이미 성불한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로서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33신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화현하면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아미타불의 왼 쪽 보처(補處)를 이루는 보살이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보면, “만약에 한량없이 많은 백 천 만 억의 중생이 가없는 고뇌에 빠지더라도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일컬으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을 얻도록 하나니라.”라고 설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 모든 고통을 없애주신다고 해서 관세음보살인 것이다.

불교는 강력한 실천사상이다. 세계가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이라고 탐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라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사상이다. 인간 삶 자체가 고통이고 세상 만물이 무상하고 연기되어 있어 그 자체가 슬픔이라면,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을 가엽게 여기고 내가 그리로 가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자는 사상이다.

흔히 우리는 자비를 남을 위한 선행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비는 나를 위한 길이다. 자비는 연기에서 비롯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사람이 어떤 할머니로부터 실은 두 사람이 이복형제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그들은 곧 싸움을 중지하고 포옹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각 존재자를 ‘우리’의 범주에 속하게 한다. 이때 ‘우리’는 각 존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독립투사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희생하는 것에서 보듯,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본질적으로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연기에 대한 대승적 깨달음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와 ‘타인을 위한 희생’을 낳는다.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이야기한다. 금을 녹여 금부처를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금부처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철학의 요체이다.

이타의 출발은 연기 이해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령된 마음[妄心]을 품어 진여(眞如)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하거나 헛된 것을 진여라 착각한다. 그러니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완전히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되었다 해도 아직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그는 진정한 부처가 아니다.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이처럼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들을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할 때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은 그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이다. 조금만 숲 속으로 발을 옮겨도 연꽃보다 예쁘게 생긴 꽃은 허다하다. 그러나 진흙 수렁 속에서 피어나기에 연꽃은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닐까?

자비는 그를 위한 길이 아니다. 그 안에서 그 스스로 부처를 발견하게 하여 그를 부처로 만들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에게서 부처를 발견한다. 그 순간 그 또한 부처가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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