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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끝이 시작이다

기자명 법보신문

인류가 정한 진리 잣대는 상대적
두 끝에 매달지 말고 중도 지켜야

사물의 모든 존재는 그 개체로서는 절대자이지만, 주변의 존재와 맞서게 되면 절대가 아닌 상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의의를 인식하려면 상대와 맞서야 정의가 이루어지지 홀로의 절대에서는 어떤 정의도 성립될 수가 없다.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되는 ‘선’도 ‘악’이라는 상대적 정의가 있어서 그 의의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윤리를 정리하기에 평생을 바친 공자도 “선과 악이 다 나의 스승이다”했는지 모르겠다.

어찌 삶의 가치적 정의만이 그러랴. 삼라만상의 존재 그 자체가 상대적이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다”는 말이 있다. 골은 되도록 아래로 뚫리는 것이요, 산은 되도록 위로 오르는 것이니, 산이 가만히 있어도 골이 깊어지면 그 산의 높이는 높을 것이고, 골이 가만히 있어도 산이 높으면 골은 깊어지는 것이다. 이 때 깊다, 높다는 표현은 상대의 존재에 따라 인정이 되는 것이지, 나의 절대만 있다면 깊고 높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산은 골이 있어 고맙고, 골은 산이 있어 고맙다.

삼라만상 중에 인류만큼 어리석음이 없거늘, 인류는 제 스스로 제 가치를 높이 인정해 놓고는 ‘만물의 영장’이니 하여 모든 만물은 물론이며 우주의 형성에서부터 지배하려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운동을 제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니 남의 도움을 받으며 움직인다. 이를 일러 인류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기에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했다 한다. 우주 존재의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놓아두고 정의한다면 이것이 발전인가. 분명히 파괴의 행위이다. 요즘의 대기 변화를 놓고 우려하는 목소리는 모두가 인류의 문명적 도구의 활용에서 오는 후유증이 아닌가. 우주 자연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괴멸하는 징후 같아 몸에 좁쌀이 돋는 기분이다.

미적 아름다움으로만 규정하여도 인류의 생김새는 다른 동물에 비하여 볼품없기 이를 데 없다. 공중을 나는 작은 새 하나를 보더라도 그 깃털의 정연한 순서적 정리나 색깔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가. 인류의 삶에 기본이 되는 옷은 이 추악한 모습을 가리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사람의 위선적 행위는 옷의 몸 가림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것이다. 밉상스런 모습을 곱상스럽게 가린다는 것이 바로 존재 그대로의 천진(天眞)을 꾸밈의 가식으로 장치하는 인위(人爲[僞])의 시작이 아닌가.

인위적 거짓을 오히려 자연적 천진의 잣대인 줄 알고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인류의 문명인 것 같아 걱정 아닌 걱정이 되어 이런 넋두리도 부려 본다. 인류가 정해 놓은 진리의 잣대가 결코 절대적이 아님을 느끼며 되돌아보다가 “두 끝에 매달리지 말라(不落兩邊)”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연상되면서 나 자신이 어느 한쪽으로 기운 잣대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정신이 혼미해진다.

미추(美醜), 선악(善惡), 장단(長短), 방원(方圓), 곡직(曲直)이 상대 아님이 없거늘 어느 한쪽에 무게를 두다 보면 다른 쪽을 경시하는 것이 역시 자연스러움이라면, 자연이란 또 수평이 아닌 기울어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질서의 기준이 평등함에 있다면, 상대적 존재의 중앙치에 기준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이 중앙치를 유지하려면 상대의 두 끝에 매달리면 안 된다.

인류의 윤리적 질서가 우주 자연의 구성으로 보아서는 인위적 질서이기는 하지만, 이 인위적 질서를 옳게 실현하기 위해 중도를 지키려고 노력한 점에서 인류의 문명은 그래도 인정되어야 한다.

상대가 있어 나의 절대가 인정된다면, 나와 상대가 만나는 그 찰나가 바로 중도이다. 상대의 저쪽 끝이나 절대의 이쪽 끝에 매달리지 말자. 나의 시작이 저쪽은 끝이지만 저쪽에서는 그것이 바로 시작이니, 둘이 아닌 하나이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시작이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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