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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 성격과 의의

기자명 법보신문

일제 치하, 불교 자주 지향한 기념비적 사건

친일파들의 조선불교대회 계획에 맞불
30본사, 107명 참석…통일 종헌 마련
대표자 잇따라 유고…총독부 외압 시련

<사진설명>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가 열렸다. 사진은 당시 참가한 스님들의 기념촬영. 사진제공=민족사.

일제시대 불교계는 사찰령의 시행으로 자율권을 말살당하고,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순응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불교계는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순응하려는 부류와 끊임없이 자율권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면서 나름대로 발전을 지향하고자 하는 세력이 공존하였다. 일제시대 불교계의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한 노력은 1920년대 초반에 전개된 불교청년운동에서 확인되지만 특히 1929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잘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승려대회는 모든 승려들이 참여하여 토론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직접 민주제 방식이다. 이렇게 직접 민주제를 채택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승려대회에 모든 승려들이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31본사에서 추천을 받은 대표들이 모여서 종헌을 제정하고, 종회를 구성하였는가 하면 집행기관으로 중앙교무원을 탄생시켰다. 종헌은 세속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이고, 종회는 국회라고 할 수 있으며 중앙교무원을 행정부라고 할 수 있다. 승려대회가 개최된 배경으로는 이 무렵 불교계는 통일기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무르익어가던 시기였다. 1924년에 성립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31본사에서 분담금을 납부하여 만든 기관이었지만 31본사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기관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전 교단 차원에서 통일된 사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1929년에 개최된 승려대회는 이렇듯 분산된 역량을 결집하여 불교계의 염원이었던 통일기관을 성립시키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1925년에 설립된 조선불교단에서 192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총독부와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훈련원 마당에서 조선불교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그보다 먼저 승려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조선불교단은 일본의 친일파 양성책 일환으로 대표적인 친일파들과 일본인 유력자들로 구성되어 1925년에 재단법인으로 발족한 불교 외호단체이다. 이 단체의 구성을 보면 단장은 이윤용이었고, 이완용·권중현·한창수 등 53명이 임원과 고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측 인사들은 전수상 교오라 게이꼬(淸浦奎吾)·귀족원의장 도쿠가와 에이사토(德川家達)·제일은행장 시부자와 에이찌(澁澤榮一) 등 정·관·재계의 거물 144명이 참여하였다. 승려대회준비위원회는 조선불교단에서 192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총독부와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훈련원 마당에서 조선불교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보다 먼저 대회의 개최를 서두른데 있다.

승려대회 준비는 1928년 11월 11일 경성에 살면서 불교계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승려들이 발기회 준비 모임을 가지고, 이 자리에서 준비위원 11명을 선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선출된 준비위원은 권상로·김포광·도진호·백성욱·오리산·김상호·김정해·조학유·김경홍·김태흡·김법린 등 이었다. 이들은 같은 날 오후에 발기준비위원회를 열고 종헌을 만들기 위한 자료 수집과 발기회 소집방법 등을 토의하였다. 같은 달 25일에 소집된 제3회 발기준비위원회에서는 종헌기초준비위원으로 권상로와 김포광을 선임하고, 교섭위원으로 도진호·백성욱, 접대위원에 김태흡·도진호·김법룡, 발기회순서작성위원에 도진호·김법린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백성욱이 단상에 올라 승려대회 개최 취지를 밝혔는데 취지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는 종헌 제정과 중앙교무원헌장 및 승니법규를 제정하여 지금까지 승단에 내규도 없는 상황에서 각 본사마다 분립된 상태에서 교단의 통일적 발전을 기할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불타의 진리를 선양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정신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서 교단의 위신과 존재가 날로 타락되어 교도들이 통탄하고 있다. 이러한 때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교육·포교·승단의 기강 등 현안 사안을 쇄신하고, 신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을 확립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승려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연령을 제한하자는 의견과 각 본말사평의회에서 추천한 자로 하자는 안 등이 논의되었으나 본사 주지를 비롯하여 각 본말사총회에서 선거한 대표로서 총회의 대표인 주지의 신임장을 가지고 온 승려로 제한하기로 결말이 났다. 12월 2일자로 조선불교승려대회준비위원장 권상로의 명의로 승려대회 소집문이 전국으로 발송되었다. 소집문의 추신에 의하면 참가 승려의 정수는 각 본말사 재적 승려 백명당 1인씩을 본말사총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백명이 안되는 곳도 백명으로 간주하여 1명을 파견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회 참가자의 명단은 12월 25일까지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승려대회를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300원을 임시 차용하기 위하여 준비위원 전원이 서명 날인하여 준비위원장인 권상로에게 위임하였다.

1929년 1월 3일부터 5일에 걸쳐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가 수송동 각황사에서 열리었다. 준비위원장 권상로의 개회사에 이어 준비위원 한보순이 파악한 참가 승려의 수는 함경남도 귀주사를 제외한 30본사에서 107명이 참석하였다. 준비위원회 측에서 파악한 참가 예정 승려 가운데 불참한 승려는 49명이었다. 이어서 사회자를 선출하였는데 사회에 권상로, 부사회에 송종헌이 선출되었다. 사회의 지명으로 서기는 김낙순·오시권·한보순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찰(査察)은 우종면과 유이청이 피선되었다. 이 날 논의된 중요한 사안은 종헌과 중앙교무원칙 및 기타 법규 제정이었다. 이 문제는 발기회에서 선임된 11인의 제정위원들이초안을 만들어 본 대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돌연 사회 권상로의 유고로 부사회인 송종헌이 사회를 보아야 하였으나 송종헌 역시 병고로 사회를 보지 못하고 전일 차점을 얻은 이혼성의 사회로 대회는 진행되었다. 종헌 제정은 제정위원들이 기초한 원안을 낭독하게 하여, 일반 회원들이 조문을 하나씩 토의하고, 다시 전체 문안을 낭독하여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종헌이 통과되자 참석자들이 모두 불전(佛前)에 선서식을 거행함으로써 종헌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이날 중앙교무원칙과 교정회법(敎正會法)·법규위원회법 등이 제정되었다. 셋째 날은 종회법과 승니법규를 제정하고, 교육·포교·재정·사회사업·기강숙청에 대한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불교청년운동에 대한 옹호책은 3월에 개최되는 종회에서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동년 1월에 버마 랭구운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대회에 중앙교무원 명의로 축전을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사진설명>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제정한 종헌.

종헌은 종명·종지·본존·의식·사찰·승니 및 신도·종회·교무원·교정·법규위원회·재정·보칙 등 총 12장 31조로 구성되었다. 종헌에 명시된 종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 칭한다’라고 되어있다. 이 종명은 조선시대 무종단 시대에 사용하였던 것을 총독부가 불교계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채택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합리한 종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총독부가 인정한 종명이었기 때문에 개명을 할 경우 상당한 마찰이 생겨날 것이 예상되었다. 이 승려대회 또한 총독부가 허가하는 범위 안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체제에 저항하는 종명을 채택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불교계의 상징적 존재인 교정은 전형위원 11명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여 전형위원회의 전형 결과로 김환응·서해담·방한암·김경운·박한영·이용허·김동선 등 7인의 승려가 교정으로 선출되었다. 종회의 소집과 개회는 교정회에서 집회의 기일을 정하도록 하였고, 의장 1인과 부의장 1인을 두고 선출 방식은 의원 중에서 무기명 투표로 하였고 임기는 2년이었다. 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과 제반 법규는 불교계의 조직과 활동 범위 및 근거를 정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선출된 교정은 불교계를 대표하고, 교계의 의사를 결집하는 종회를 소집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는 식민지 치하에서 자주적으로 종헌과 입법부 및 집행부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이 대회의 의미는 불교계가 식민지 지배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발전을 지향하였다는 점에 있다. 더구나 참여 대상을 전국 31본사에서 선발된 대표자로 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불교계의 총의를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의의 못지않게 한계점 또한 적지 않다. 대회를 주도하였던 대표자들이 대회 초반부터 유고로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총독부 측의 외압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서 언급한 조선불교단의 기관지 『조선불교』에는 승려대회의 의의를 축소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글이 실린 것에서 그러한 추측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종명을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택한 것은 총독부와 마찰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지만 분명한 한계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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